[imazine] 영혼의 풍경, 백록담과 오름②
(제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제주도의 오름은 공식적으로 368개이다. 등록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오름 수는 이를 넘어선다. 하루에 하나씩 오르더라도 1년에 다 탐방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년 동안 하루에 하나씩 올라도 못다 오를 오름들
오름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제주. '오름 왕국'이다. 생성 시기, 생태, 인간 삶과 얽힌 사연이 오름마다 각양각색이다. 분화구 모양, 화구 능선 등 오름의 '개성'을 알아내고, 이런저런 사연에 귀 기울이며, 정상에 서서 바다, 하늘, 들판을 바라보고,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육지 등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력이라는 게 제주 오름들을 거의 다 올랐다는 김상수 거문오름 자연유산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오름을 오르다 보면 아름답고 소중한 제주 땅의 자연과 역사를 몸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용눈이 오름은 평생 제주 사진을 찍어 제주의 매력을 알렸던 김영갑 작가가 사랑했던 오름이다. 용눈이는 한 봉우리 안에 분화구가 셋 있다. 용암이 세 번 분출했음을 뜻한다.
세 분화구가 연출하는 지형은 마치 용이 누운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용눈이는 해발 247m, 비고 88m이다. 20분 정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부드러운 능선이 나그네를 반긴다.
정상에 오르니 다랑쉬 오름을 비롯해 손지, 동거문, 백약이, 좌보미, 두산봉, 높은오름 등 구좌읍의 오름 군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오름은 한라산 동쪽과 서쪽 중산간지대에 밀집해 있다. 용눈이 정상은 동부 오름 지대인 구좌읍 오름 무리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다랑쉬 오름은 크고 깊은 분화구가 탐방객을 압도한다. 밑지름 1,013m, 전체 둘레 3,391m로 비교적 큰 몸집인 다랑쉬의 정상에는 깔때기 모양의 원형 분화구가 움푹 파여 있었다.
분화구 깊이는 백록담의 깊이와 비슷한 115m이다. 다랑쉬에는 제주 4·3의 아픈 역사가 얽혀 있다. 다랑쉬굴에 인근 마을 주민 11명이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가 피운 불에 질식사했다. 1992년 어린아이를 포함한 이들의 시신들이 발견됐다. 다랑쉬 옆에는 아끈 다랑쉬 오름이 있다. '아끈'은 '버금' '둘째'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이다.
아끈 다랑쉬는 이름처럼 앙증맞은 오름이다. 꼭대기에 둘레 약 660m의 원형 분화구가 있는 아끈 다랑쉬는 다랑쉬로 오르다 보면 발밑으로 내려다보인다. 금방이라도 내달려서 아끈 다랑쉬로 건너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랑쉬의 이름은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다는 데서 기인했다. 높다는 뜻의 '달'에 봉우리라는 의미의 '수리'(쉬)가 합쳐졌다는 풀이도 있다.
산굼부리는 세계 유일의 평지 분화구이다. 지구가 만들어낸 걸작으로 꼽힌다.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 없이 열기의 폭발로 암석을 날린 뒤, 구멍만 남은 마르형 화산체이다.
'굼부리'란 분화구를 일컫는 제주 말이다. 드넓은 들판이 푹 꺼져 들어가 커다란 구렁이 만들어진 것 같은 형상이다. 화구 깊이 140m, 화구 지름 650m, 화구 둘레 2㎞이다. 분화구가 백록담보다 넓고 깊다.
지질학적 가치가 큰 이색 지형이어서 많은 외국인이 방문한다. 산굼부리는 다양한 희귀식물이 존재하는 분화구 식물원이기도 하다. 굼부리 주변 넓은 억새밭은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산굼부리에서는 여문영아리, 구두리, 말찻, 궤펜이, 성널, 마은이, 물찻, 넙거리, 비치미, 좌보미, 까끄레기, 돔베, 물장오리 등 수많은 주변 오름을 조망할 수 있었다.
아부 오름은 정상에 함지박 같은 둥그런 굼부리가 패여 있었다. 굼부리 안에 인공으로 심은 원형의 삼나무 숲이 눈길을 끌었다. 굼부리 능선을 따라 난 산책로는 걷기 순례자를 유혹했다. '아부'는 '앞'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송당마을과 당오름 남쪽에 있어 일찍부터 아보름이라 불렸다. 오름 모양이 마치 집안 어른이 믿음직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데서 '아부'(亞父) 오름이라 일컬어졌다는 설도 전한다. 아부 오름의 바깥둘레는 약 1,400m, 화구 깊이는 78m, 비고는 50m 정도 된다.
화구 바닥이 인근 도로보다 낮다. 주차장에서 10분 정도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아부 오름을 만날 수 있다. 시원하게 트인 사방에 이름 모를 오름들이 산재해 있었다.
수월봉은 세계 '화산학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오름이다. 제주도 서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발 77m이다. 수월봉은 바닷속에서 화산이 폭발해 생긴 수성화산체이다. 분화구는 현재 바닷속에 잠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월봉은 바닷물에 의해 침식돼 단면이 노출돼 있었다. 노출된 단면을 통해 화산활동의 여러 현상을 연구할 수 있다. 절벽을 이루는 암석에는 화산쇄설물이 퇴적돼 형성된 층리가 뚜렷했다.
폭발 때 날아와 절벽에 박힌 크고 작은 암석들이 만든 탄낭이 산재해 있다. 수월봉 해안 절벽은 '엉알'이라고 불리며, 절벽 밑으로 약 3㎞의 엉알길이 탐방로로 조성돼 있었다.
전망대에서는 차귀도, 송악산, 단산, 죽도가 내려다보였다. 절벽 자락에 일제가 파 놓은 진지 갱도들은 고통과 회한의 역사를 환기하고 있었다.
군산 오름은 정상 직전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어 탐방하기 쉽다. 오백나한, 어승생악, 산방산 다음으로 비고가 높은 오름이다.
정상에는 용머리 모양의 쌍봉이 있다. 군산은 대평리의 넓은 들인 난드르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화산쇄설물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오름으로는 제주도에서 최대 규모이다.
스코리아라고 불리는 화산송이가 부서져 만들어진 토양의 붉은 색이 선명했다. 군산 오름에는 일제가 파 놓은 진지 갱도 9개가 있었다.
'오름의 여왕' 거문 오름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과 함께 2007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 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분화구 내부의 울창한 수림이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신령스러운 공간'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겨 있다. 거문 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이 북북동 방향으로 약 14㎞ 떨어진 해안까지 흘러가면서 형성한 일련의 용암동굴군을 거문오름용암동굴계라고 일컫는다.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벵뒤굴 등 제주의 대표적 용암동굴들을 만들어낸 모태가 거문 오름이다.
거문 오름의 해발 고도는 456m. 오름 능선에는 9개의 봉우리인 구룡이 둘러서 있다.
북동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가 커다랗고 깊게 패여 있으며, 그 안에 작은 봉우리인 알오름이 솟아 있다. 오름 정상에서 분화구를 내려다볼 수 있으며, 거문을 중심으로 오름 군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거문 오름에서는 사방으로 120여 개의 오름을 조망할 수 있다.
거문에는 오름 능선과 분화구 내부를 걸을 수 있는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정상에 설 수 있는 정상 코스(2.1㎞), 분화구 안을 탐방하는 분화구 코스(5㎞), 제1용부터 제9용까지 9개 봉우리를 모두 걷는 전체코스(6.7㎞)가 그것이다.
전체 코스를 걷는 데는 약 3시간 반 걸린다.
암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생긴 용암협곡, 붓순나무와 식나무 군락지, 숯가마 터, 풍혈, 수직동굴, 용암 함몰구, 일본군 진지 갱도 등 희귀 식물과 지형을 분화구 코스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용암협곡은 폭 80∼150㎝, 깊이 15∼30m, 길이 약 2㎞ 규모였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붓순나무와 식나무가 큰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풍혈은 지층 변화로 생긴 구멍으로, 차가운 바람이 나온다. 수직 동굴은 항아리 모양의 독특한 용암동굴로, 깊이가 35m에 이르렀다. 용암함몰구는 연중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돼 겨울에도 울창한 숲을 유지하고 독특한 식생을 구성하고 있었다. 일제가 거문에 만든 진지 갱도는 10여 곳에 이른다.
제주만의 숲, 곶자왈
곶자왈은 제주 용암지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숲이다. '곶'은 숲, '자왈'은 돌무더기를 뜻한다. 돌무더기 위에 피어난 숲이 곶자왈이다. 흙이 아닌 돌무더기 속에서 식물이 자라기는 어렵다.
그러나 제주 용암이 부서진 돌무더기 위에는 겨울에도 푸른 숲이 조성돼 있었다. 부서진 용암 사이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땅속의 따뜻한 기운과 습기가 식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흙 대신 돌에서 양분을 얻기 위해 돌무더기를 뿌리로 끌어안고 있다. 그래서 곶자왈의 식물과 나무들은 얼키설키 얽혀 덤불 같다. 화산활동은 오름을 탄생시켰고, 오름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빚은 숲이 곶자왈이다.
곶자왈에서는 연중 일정한 기온과 습도가 유지되기 때문에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공존해 생태계의 허파 역할을 한다. 거문 오름 곶자왈은 초록 이끼와 양치류, 상록 낙엽수들이 초록 숲을 형성해 '겨울 속의 봄'을 구가하고 있었다.
제주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습지는 곶자왈 숲에 형성된 내륙 습지이다. 선흘리 곶자왈은 지표의 돌무더기 아래 있는 용암층이 물을 덜 빠지게 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소규모 연못, 우기에 습지로 변하는 건습지 등을 형성한다.
이 습지에는 순채, 어리연꽃, 통발, 송이고랭이 등 다양한 습지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제주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된 제주고사리삼이 드물지만 자라고 있었다. 먼물깍 습지는 곶자왈에서 보기 드문 큰 연못이었다.
동백동산 습지는 평지에 형성된 난대 상록활엽수림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면적이 넓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대표 명소이며 람사르 습지로 보호받고 있다. 곶자왈은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에 버려진 땅, 불모의 땅으로 여겨졌으나 제주의 허파, 제주도에서 귀한 물을 함양하는 지하수 저장소로서 재조명받고 있다.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가다
제주에서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에서 자라고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오름은 삶의 터전이었고, 오름 없는 제주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오름 여기저기에는 역사와 삶의 흔적과 생채기가 흩어져 있다. 일제가 제주도를 자국 방위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삼으려 했던 야욕, 제주 4·3의 상처가 며칠 동안 탐방했던 오름에만도 여럿 있었다.
제주인들은 오름 기슭에서 마을을 이루고 밭농사를 지었다. 연원이 고려 시대로 올라가는 제주 목축업은 오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침략과 항쟁의 시기에 오름은 피난과 저항의 근거지가 됐다.
고려 시대 삼별초의 난, 4·3때 그러했다. 표선면에 있는 붉은 오름은 몽골에 항전한 삼별초의 최후 결전지이다. 그런가 하면 오름은 시인, 묵객, 예술가들에게 찬미 대상이 되고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름 없는 꽃들이 만드는 세상
오름에 '미친' 오름나그네들이 꽤 된다. 김원순 한국문화관광해설사 겸 제주돌담연구소장은 오름 동아리를 약 700개로 추정했다.
이 모임에는 오름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지역 연구가들이 적지 않다.
뭍에는 낯설고 제주에서조차 잊혀 가던 오름 답사기를 주 2회, 200회 가까이 지역 신문에 연재해 오름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김종철 선생은 오름에 살다시피 했다. 그가 쓴 '오름나그네' 3부작은 오름 탐방객의 필독서이다.
제주에 '홀린' 사진작가 김영갑은 1천 장 가깝게 용눈이 오름 사진을 찍은 뒤 '내가 본 이어도 1-용눈이 오름' 전시를 연 바 있다.
김영갑에게 용눈이는 환상의 세계이자 낙원이었다. 궁핍 끝에 얻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영갑이 맨손으로 일군 갤러리 '두모악'이 성산포 가까이에 있다. 두모악에 가면 그의 영혼이 담긴 용눈이 사진이 이번에는 관람객을 홀린다.
김종철의 부인 김순이 시인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이름 없는 것들이/열심히 피고 지는 까닭에/세상은 아직도 아름답다'고 했다. 제주에는 열심히 피고 지는 꽃들이 많았다. 김종철, 김영갑, 제주를 아끼는 향토사학자들은 그러한 꽃이었다.
오름 답사 열풍은 오름지기, 오름꾼, 오름 마니아, 오름러 등 신조어를 낳았다. 오름만 집중적으로 탐방하는 육지 관광객들도 생겼다. 뭇 생명이 숨죽이고 휴식하는 겨울 속 오름은 황량하고 쓸쓸했다.
그 고적함에서 평화를 얻는 것은 제주의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이 일상이 되고, 삶이 되는 현대에 오름은 힐링을 선사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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