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든’은 무엇을 담아야 하나[김선미의 시크릿가든]
“K-가든을 너무 어렵게 접근하기보다 한 번도 한국 정원을 못 본 외국인들을 생각하면서 만들면 좋겠습니다. 다만 K팝이 우리 민요 형태가 아니듯 K-가든도 현대 감각으로 풀어야 합니다.” (최재혁 오픈니스 스튜디오 소장)
“비무장지대(DMZ) 같은 한국의 분단 현실도 ‘K-’ 콘텐츠입니다. K-가든은 형태와 사상을 포함해 현대의 재료와 기술을 활용해 전통을 재해석한 한국의 정원입니다.” (정미애 국립수목원 연구사)
정원은 소득 3만 달러 시대의 여가문화로 꼽힌다. 정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요즘 ‘K-가든’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지난해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국제원예박람회에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한국 정원을 조성한 이후 K-가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K-가든은 당초 산림청에서 추진하는 정원 진흥사업에 명기된 용어다. 하지만 K-가든이 무엇인지 아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외국에 조성하는 한국 정원인가, 한국 전통 정원을 구현한 정원인가. K-가든은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이런 고민 속에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6일 국립세종수목원 대강당에서 ‘한국의 정서와 개성을 담은 K-가든 워크숍: 정원, 한국을 담다’를 마련해서 다녀왔다. 시의적절하고 뜻깊은 행보였다고 생각한다.
사회를 맡은 노회은 국립세종수목원 정원사업센터장이 이날 행사의 포스터를 가리키며 객석에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이 포스터가 마음에 드시나요. 요즘 어린이들도 알만한 존재가 디자인했는데 말이죠.” 챗GPT가 30초 만에 뚝딱 만든 포스터였다.
“포스터에서 일본 정원 느낌이 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챗GPT에게 K-가든에 대해 새로운 명령을 내려도 일본 정원이나 중국 정원 같은 이미지가 계속 나옵니다. 그동안 일본과 중국 정원이 한국 정원보다 축적된 데이터가 많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K-가든이 널리 퍼지면 그때에는 저희 마음에 쏙 드는 포스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개회사를 맡은 류광수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이사장은 말했다. “K-가든은 급조된 개념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국립세종수목원은 ‘K-가든’과 ‘도시 속’을 키워드로 2020년 문을 열었거든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해외에 조성하는 정원만 K-가든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아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국내에서 무엇이 K-가든인지 모델을 제시해야 하는 거죠. K-가든은 기존의 한국 전통 정원과는 다릅니다. 전통 한복이 아니라 개량 한복을 어떻게 국민 생활 속에서 잘 보급하고 현대화시킬 것인가, 이게 K-가든 논의의 시작점이 돼야 할 것 같습니다. 반려식물 키트부터 스마트 가든, 정원도시, 정원박람회에 이르기까지 정원산업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K-가든이 진화해야 합니다. 정원의 형태와 디자인 등이 잘 정리돼 K-가든의 범위가 정립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가장 먼저 ‘국가별 대표정원 사례와 시사점’을 발표한 황주영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박사는 영국 프랑스 등이 정원을 문화유산으로 다뤄온 역사적 흐름을 소개했다.
황 박사는 “정자 놓고 소나무 심는 등 몇 가지 가시적인 오브제를 갖고 한국 정원이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정체성과 문화를 어떻게 정원에 담는가”라고 했다. 영국다움, 프랑스다움처럼 한국다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한국적 요소를 재현할 수 있는 식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식물에만 치중하면 정원이 갖는 의미가 축소될 수도 있다고 했다.
최재혁 오픈니스 스튜디오 소장은 카타르 도하에 조성한 1200㎡ 규모의 한국 정원 사례를 소개했다. 이 정원은 한국 전통 별서 정원의 공간 구성방식을 차용해 산수(山水)정원, 주택정원, 원림 정원 등 3개 공간으로 구성됐다. 한국 처마의 단아한 선과 물에 비치는 자연을 표현했다.
“켜켜이 쌓인 산수를 지나 원림에 다다라서 조용히 머무는 정원의 이미지를 외국인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소쇄원이나 병산서원을 보면 자연에 터를 잡고 주변 자연을 정원의 일부로 끌어들인 선조들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검박한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도하의 한국 정원은 마당에 여백을 뒀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는 철 재료를 사용해 현대적 느낌으로 첩첩산중을 나타냈습니다. K-가든은 역사적 맥락 뿐 아니라 현대 조경을 포용력 있게 담아야 할 것입니다.”
경기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에서 30여 년간 정원총괄 이사를 맡았던 이병철 보성그룹 부사장은 한국 정원의 미의 특성으로 곡선과 비대칭의 균형, 사계절이 분명한 다채로움을 꼽는다. 그는 K팝을 통해 K-가든의 발전방안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요즘에는 한국인이 없거나 구성원이 다국적인 K팝 그룹이 많이 생기고 있잖아요. K팝처럼 수용성이 커져야 K-가든도 저변이 넓어질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일본 정원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유명 관광지에 가면 꼭 일본 정원이 있지요. 일본은 정원 문화 콘텐츠를 굉장히 단순하게 프로그램화시키고 현지 식물과 문화를 접목시켜 그 나라에 맞는 일본 정원으로 재탄생시키거든요. 전통을 어떻게 재현할 건지 근시안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세계인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우리 정원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찾아야 합니다.”
정미애 국립수목원 연구사는 ‘K-가든 실증 기반 개념 정립과 적용 연구’를 발표했다. 국립수목원은 완전성(채와 마당으로 이뤄진 공간 구조), 역사성(조선 중·후기~근대), 보존성 등의 기준으로 민가 정원의 현황을 조사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민가라는 공간을 통해 원형을 추적해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현대 정원을 살펴보니 카페와 레스토랑에 실내 정원이 구현된 곳이 많습니다. 정원이 과거에는 개인의 영역이었지만 공공이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또 식물과 정원이 미술 공연 사진 음악 등 다양한 문화와 결합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K-가든의 개념을 정립할 때 도움이 되도록 계속 자료를 구축해 K-가든의 대중화 방안을 모색하겠습니다.”
김명회 산내식물원 대표는 3만 종에 가까운 조경식재용 식물을 재배하고 보급해왔다. 그는 ‘한국 정원 식물 소재 트렌드’를 소개하며 지역 특성에 따른 수종을 선정하고, 디자인 소재로서 식물 데이터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우리 자생식물이 K-가든의 중심 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 기후와 토질에 적합한 식물을 잘 선발해야 합니다. 하나하나의 식물 데이터도 절실하고요. 뇌성목, 노각나무, 당단풍나무, 팥배나무 등이 좋은데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건 분꽃나무입니다. 꽃, 향기, 단풍 등이 완벽한 자생식물이거든요. 개나리도 외부에 알리기 좋은 K-가든의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나리를 너무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 전통 정원을 중심으로 한 K-가든의 재발견’을 발표한 박원순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실 실장은 세종수목원 내 한국 전통 정원을 소개했다. 창덕궁 후원을 재현한 이 정원은 궁궐정원, 별서 정원, 민가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세종수목원 솔찬루는 창덕궁 후원 주합루, 세종수목원 도담정은 창덕궁 후원 부용정을 거의 똑같이 재현했는데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창덕궁 후원 같은 정원을 중부 지방에서도 즐겼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재현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전통 정원에서 무엇을 즐길까’를 고민했습니다. 일례로 부용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연꽃이죠. 경남 함안군에서 발견된 700년 된 씨앗을 발화시켜 만든 아라연꽃을 지난해 전시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손잡고 꽃담 전시를 하면서 꽃담의 패턴을 만드는 체험도 진행했습니다.”
그는 “요즘 MZ세대들이 갈구하는 ‘풀멍(풀 보며 멍때리기)’ ‘꽃멍(꽃 보며 멍때리기)’ 같은 힐링이 반려식물 문화와 접목되면 훌륭한 K-가든 콘텐츠가 될 것”이라며 “자연스러움의 미학이 있는 K-가든의 콘텐츠들을 발굴해 세계인이 공감하는 한국의 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네 시간 동안 진행된 이 날의 주제 발표 및 토론은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토론 맨 마지막에 신창호 국립세종수목원장의 정리 멘트가 간결하면서도 명쾌했다.
“K-가든도 K팝처럼 먼저 우리 국민이 좋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세계로 나가 세계인의 공감을 얻어야 ‘K-가든’이란 용어를 붙일 수 있겠죠. 서두르지 말고 공론화 기회를 자주 만들어 튼튼한 배경을 세워야 K-가든이 성공할 것입니다. K-가든을 통해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개념을 하나씩 잡아가면서 즐거움을 찾고, 그 즐거움 속에서 ‘아, 이게 K-가든이구나’ 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세종=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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