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로우와 레이나가 (김연경과) 만나 팀이 된다는 것[발리볼 비키니]

황규인 기자 2024. 2. 8.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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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 윌로우(왼쪽)와 레이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좋은 팀은 완벽한 선수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실체’가 아니라 부족한 것이 많은 선수들이 서로를 연민하고 빈자리를 메우려 도우며 도달하는 어떤 ‘상태’가 아닌가 싶다.” ─ 곽한영 ‘배구, 사랑에 빠지는 순간’

지금은 연일 프로배구 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지만 흥국생명 윌로우(26·미국)는 ‘완벽한’은 물론 ‘좋은’이라는 형용사도 앞에 붙이기 힘든 선수였습니다.

그랬다면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때 두 번이나 ‘물을 먹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같은 팀 레이나(25·일본)도 아시아쿼터 선수 드래프트 때 전체 최하위로 지명을 받은 선수입니다.

그런데 두 선수가 만나 팀을 이루면서 흥국생명은, ‘배구 여제’ 김연경(36·흥국생명)이 김연경치고는 부진을 겪는 상황에서도, 두 경기 연속 셧아웃(3-0) 승리로 5라운드를 시작했습니다.

‘OH’는 아웃사이드 히터, ‘MB’는 미들 블로커, ‘S’는 세터, ‘OP’는 오퍼짓 스파이커

지난달 25일자 ‘발리볼 비키니’(https://bit.ly/49qnA05)는 김연경과 외국인 선수가 모두 후위에 있을 때 흥국생명이 공격에 애를 먹는다는 내용을 다뤘습니다.

그러면서 “김연경과 대각에 서는 아웃사이드 히터가 받쳐 주지 못하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고 썼습니다.

여기서 ‘김연경과 대각에 서는 아웃사이드 히터’가 바로 레이나입니다.

레이나는 옐레나(27·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함께 뛴 4라운드까지 공격 효율이 0.244밖에 되지 않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다 5라운드 들어 윌로우와 호흡을 맞추면서 이 기록을 여자부 현재 1위인 0.507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배구에서 선수 A와 선수 B가 ‘대각에 선다’는 건 A가 전위에 있을 때 B는 항상 후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선수 A가 후위에 있을 때도 선수 B는 항상 전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김연경이 후위에 있을 때는 레이나가 전위 왼쪽에서 공격을 책임져 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로테이션 상황 세 번 중 두 번은 윌로우도 항상 전위에 있습니다.

윌로우는 예전에 ‘라이트’라고 부르던 오퍼짓 스파이커니까 코트 오른쪽을 책임집니다.

리베로 도수빈(왼쪽)과 함께 상대 서브를 받고 있는 김연경.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이런 상황에서 레이나의 공격력이 떨어진다면 상대 팀 블로커는 코트 왼쪽을 비워도 됩니다.

김연경에게 서브를 넣는다면 중앙까지 비우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아웃사이드 히터가 후위에 있을 때는 코트 중앙에서 ‘파이프 공격’을 시도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김연경이 서브 리시브에 신경 쓰느라 코트 가운데 공간을 차지하면 세트(토스)는 오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흥국생명은 4라운드 때까지 미들 블로커가 주로 시도하는 속공을 선택한 비율(6.5%)이 여자부 7개 구단 가운데 가장 낮은 팀이기도 합니다.

스파이크를 날리고 있는 흥국생명 레이나.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상대 감독 성향 또는 경기 상황에 따라 반대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퍼짓 스파이커에게 블로커를 붙여도 어차피 점수를 내줄 테니 왼쪽을 봉쇄하자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선수라도 블로커 숫자가 늘어나면 점수를 올리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레이나는 4라운드까지 상대 블로커가 없거나 한 명일 때(러닝 세트)는 공격 효율 0.368을 기록했지만 2명 이상일 때(스틸 세트)는 0.188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양쪽 날개’가 균형을 이룰 때 상대 블로커를 헷갈리게 만들 수 있고 그래야 다시 팀 전체 공격 효율도 올라오게 됩니다.

2일 장충 GS칼텍스-흥국생명 경기 장면. KBSN 중계화면 캡처

레이나가 윌로우의 덕을 보고 있는 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레이나는 2일 장충 GS칼텍스전이 끝난 뒤 “블로커 한 명의 존재가 큰 영향을 끼친다. 윌로우가 있기에 상대 블로커가 그를 의식하고 그래서 공격이 수월해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위에 있는 GIF를 보시면 GS칼텍스 블로킹 라인이 윌로우를 의식하다가 레이나에게 ‘원(1) 블로킹’ 상황을 내주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날 경기만 놓고 보면 레이나가 공격을 시도한 27번 중 11번(40.7%)이 러닝 세트 상황이었습니다.

4라운드 때까지 레이나가 러닝 세트 상황에서 공격을 시도한 비율은 29.0%였습니다.

김연경(왼쪽)과 윌로우.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이렇게 느끼는 건 윌로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윌로우 역시 “레이나와 김연경 덕분에 상대 블로커가 한 명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각이 비어 공격하기가 쉬웠다”고 말했습니다.

레이나와 윌로우가 이렇게 상부상조하면서 흥국생명은 5라운드 들어 김연경이 후위에 있을 때도 팀 공격 효율 0.393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국생명은 4라운드 이전까지는 같은 상황에서 공격 효율 0.238에 그친 팀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선수들이 서로를 연민하고 빈자리를 메우려 도우며 어떤 ‘상태’에 도달한 겁니다.

2일 장충 경기가 끝난 뒤 기념 촬영 중인 흥국생명 선수단.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물론 ‘사물·현상이 놓여 있는 모양이나 형편’(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하는 상태(狀態)는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GS칼텍스는 상대에게 러닝 세트를 허용하는 비율(32.2%)이 여자부 7개 팀 가운데 가장 높은 구단 = 블로킹에 약점이 있는 구단입니다.

반면 8일 맞대결 상대인 정관장은 상대 공격 시도를 블로킹 득점으로 연결한 비율(6.5%)이 가장 높은 팀입니다.

김연경, 레이나, 윌로우 삼각편대가 서로를 도와 정관장의 블로킹 벽도 뚫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때 흥국생명의 상태는 비로소 ‘보통 때의 모양이나 형편’을 뜻하는 상태(常態)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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