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면 전환’…무대예술로 드러나는 목소리[이주영의 연뮤 덕질기](19)
공연 관람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실감 여행이다. 객석에 들어서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관련 오브제들이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아치)에 설치된 것을 발견하면 심박수가 한층 뛰어오른다.
뮤지컬 <일 테노레>는 프로시니엄 아치에 커다란 조명기기가 가득 들어차 있다. 공연을 다루는 메타 공연임을 드러내는 요소다. <드라큘라>는 오래된 시신 같은 조각상들이 무대 전체를 두르고 있다. 객석에 앉으면 오싹해진다. <마리 퀴리>는 야광 초록으로 덧칠된 실험실을 통해 퀴리 부인이 발견한 라듐 원소를 시각화했다. 라듐과 방사선에 대한 흥미를 돋우는 설정이다. 연극 <템플>은 창문과 사다리가 텅 빈 공간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자폐 스펙트럼 증상을 보이는 주인공의 소통을 다루는 작품임을 시사한다.
현재 상연 중인 이 작품들은 내용도 장르도 모두 다르지만, 시대를 거슬러 소신껏 목소리를 낸 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난관을 딛고 자신의 꿈을,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과정을 담아냈다. 후반부 무대예술의 변화를 통한 국면 전환은 이를 시각과 청각, 질감 등 여러 감각을 통해 관객들이 수용하도록 이끈다. 관객들로선 편히 여행하던 중 예상치 못한 신세계를 맞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오페라 제작을 통한 독립운동을 다룬 <일 테노레>는 의사 출신 조선 최초 테너 이인선(1907~1960)을 모티브로 한 순수 한국 창작 뮤지컬이다. 조선어가 금지된 1937년 전후,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고 항일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학생들과 예술인들이 연대해 조선 최초 오페라를 상연하는 과정을 그렸다.
독립운동 서사는 대부분 암울하지만 <일 테노레>는 폭소로 시작한다. 세브란스 의전을 다니며 문학회에서 활동하던 윤이선이 성악을 접하고 의사가 아닌, 성악가로서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과정은 관객들의 갈채를 이끌어낸다. 의사냐 성악가냐를 고민하는 윤이선과 무장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건축학도 이수한, 문화 독립운동이 먼저라는 여성 지도자 서진연 등은 이탈리아 오페라 ‘꿈꾸는 사람들’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제 수괴를 처단하는 ‘까마귀 암살 작전’을 기획한다.
무대 전체가 반회전, 전회전을 하며 소박한 학생공연장이 당대 최고의 극장 부민관으로, 또 수십 년 후 개발도상국 한국의 오페라 전용극장으로 바뀐다. 단순한 무대 회전이 아닌 극장 전체의 전환이다. 새로운 국면으로 향하는 꿈의 전환이기도 하다.
브램 스토커 원작, 브로드웨이 버전의 라이선스 뮤지컬 <드라큘라>는 2014년 한국 초연 이후 다섯 번째 시즌에 이를 만큼 두터운 마니아층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연인 엘리자베스가 환생한 현생의 미나를 쟁취하려는 드라큘라와 흡혈귀 사냥꾼을 돕는 미나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의 백미는 반 헬싱과 조나단 등 흡혈귀 사냥꾼들의 드라큘라 추적 장면이다. 미나의 집에서 런던 거리로, 다시 드라큘라의 저택으로 향하는 시공간 이동 장면이 엇갈려 돌아가는 4개의 회전무대로 인해 9개의 거대한 기둥과 저택 세트들이 교차하는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라이브 무대로 이를 목격하는 관객들은 거대한 세트 사이를 위험하게 넘나드는 배우들의 신기에 눈을 떼지 못한다. 드라큘라가 잠든 관에 사냥꾼들이 십자가를 박으려 하지만 공중 부양하거나 관 안에서도 다른 시공간을 넘나드는 드라큘라는 여전히 불멸의 존재임을 드러낸다.
400년 전 드라큘라와 엘리자베스의 초상화를 발견한 미나는 엘리자베스였던 전생을 각성하고 드라큘라에게 사랑을 약속한다. 하지만 미나의 불멸은 곧 영원한 죽음임을 깨달은 드라큘라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캐스트에 따라 다른 초상화로 바뀌는 이 거대한 무대 소품은 회전하는 시공간과 함께 드라큘라와 미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각성하는 바람에 결국 비극에 이르게 되는 국면 전환을 위한 무대장치다.
무대 전체가 뒤바뀌는 대형 작품들과는 다른 측면의 무대예술을 뮤지컬 <마리 퀴리>는 선보인다. 라듐을 발견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퀴리 부인의 일생을 다룬 한국 창작 뮤지컬로 2020년 초연 이후 세 번째 시즌인 작품이다. 20세기 초 라듐의 양면성과 사회적·정치적 딜레마를 직시한 마리 퀴리의 결단과 주변인들의 변화를 다룬 본격 과학 뮤지컬이기도 하다.
대사와 넘버에 전문용어가 많아 어렵게 느껴짐에도 폴란드를 비롯해 영국, 일본, 중국 등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정의와 양심, 인류애를 다룬 서사의 힘이다. 아름다운 넘버들과 개연성 있는 구성과 함께 라듐을 직관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무대예술의 힘도 크다. 라듐의 양면성을 온몸으로 입증한 마리의 삶은 라듐의 상징인 야광 초록 무대로 확장된다. 방사선에 희생된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마리 퀴리 스스로 위험성의 증거가 되기로 한 순간은 초록 광선의 빛이 사라지는 무대 전환으로 시각화했다.
자폐 스펙트럼을 딛고 미국 동물시설의 반 이상을 설계한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연극 <템플>은 무대 자체가 작품이다. 이미지로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템플의 삶을 소통을 상징하는 창문 오브제들과 신체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배우들의 신체 언어가 ‘자폐 스펙트럼은 냉정한 부모가 원인’이라고 주장한 당시 정신의학자들의 편견을 풍자한다. 템플의 삶을 재단한 수많은 편견의 장벽을 허무는 무대예술과 신체 움직임이 관객들에게 아날로그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소통 부재 사회에 떨어진 한 방울 윤활유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긴 설 연휴를 앞두고 있다. 의미에 더해 스펙터클하고 섬세한 무대예술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작품들을 보면서 친지들과 의미 있는 토론을 벌이다 보면 연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선 최초 오페라 공연을 통해 꿈을 꾸었던 일제강점기 청년들의 삶(일 테노레)과 편견 속 자기 목소리를 내는 당당한 여성의 결단(드라큘라·마리 퀴리), 소통의 힘을 신체로 공감하는 새로운 방식(템플) 등은 2024년 동시대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삶의 태도와도 닿아 있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와 <템플>은 2월 18일, <일 테노레>는 2월 25일, <드라큘라>는 3월 3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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