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서사'만 챙기는 양형... "피해자 안타까움은 누가 알아주나요?"
최악의 살인에서도 '유리한 양형요소' 찾는 법원
엄중한 처벌 원하는 피해자·유족들은 이해 못해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 지원은 제대로 된 판결"
편집자주
보통 피해자 뇌리에 박힌 가해자의 모습은 범행 현장에서 그 악마 같았던 무서운 얼굴입니다. 그러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법정을 찾은 피해자들은 '순한 양' 같은 가해자(피고인)의 태도에 무척 큰 괴리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가해자들은 형을 낮추려고 반성문을 쓰고, 불우한 환경을 강조하는 서사를 만들며,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이란 점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판사들은 마음을 고쳐먹을 것 같은 그 '순한 모습'만 보고 판결을 내립니다. 도대체 '피해자의 서사'는 누가 챙겨주는 걸까요? 법관이 가해자의 개인적 사정과 성장 배경을 참작해 피해자 의사에 반하여 용서해주는 이 시스템이 과연 온당한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피고인은 이혼하고 자녀와 따로 살았으며,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분노, 자신에 대한 실망, 좌절, 무기력 등으로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범행 당일에도 자살하러 집으로 가는 중, 피해자를 만나 분노가 폭발해 범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요소다."
아랫집 노인을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뒤 돈까지 훔쳤다. 이 잔혹한 '신월동 방화살인'에서, 지난해 11월 서울남부지법은 피고인 정모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법원은 범행의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유족이 원했던 사형은 선고하지 않았다. 대신 피고인이 양형조사까지 신청하며 주장한 여러 사정들이 유리한 양형요소에 포함됐다.
이혼하고 돈 없이 힘들게 살면 다 사람을 죽이나? 유족은 "납득할 수 없다"고 울분을 토했다. '불우한 환경'이 살인을 정당화하는 요소가 조금도 될 수 없음에도, 재판부가 '살인자'의 일방적 주장만 듣고 양형에 반영했다는 게 유족 주장이다.
유족 A씨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평생 가난하게 살아오셨지만 항상 남에게 베푸셨다"며 "2년 동안 (가해자에게) 누수 피해를 당하면서도 아무 말 못 했을 정도로 정말 천사 같은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법원은 왜 '살인자의 서사'는 양형에 반영하면서 천사 같은 '어머니의 서사'는 양형에 반영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씨가 자살을 하려다 살인을 했다'는 결론, 이를 재판부가 감형 이유로 든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A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자살하려다 '누수를 보러 왔다'는 거짓말로 남의 집에 침입하고, 미리 준비한 칼로 치욕스러운 범죄를 저지르냐"며 "재판부가 사형 선고가 부담스러우니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보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범죄피해자와 유족들이 하나같이 입 모아 한 얘기가 있었다. "국가가 피해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은 제대로 수사하고 제대로 판결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재판 결과에 만족하는 피해자는 드물다. 판사가 가해자 형량을 정하며 읽어내리는 양형의 이유는 대개 △붙잡힌 뒤의 자백 △판사 앞에서의 반성 △힘들었던 가해자의 삶 같은 것들이다. 가해자의 '선의'를 최대한 참작하려는 이러한 양형 이유는 피해자들에겐 또 다른 고통이다.
'불우한 환경' 같은 양형 이유는 신월동 방화살인 재판처럼 형의 종류(사형·자유형·벌금형)를 선택할 때뿐 아니라, 징역형 형량을 정할 때에도 정상참작 감경(작량감경)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한다. 형법 53조는 "범죄에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정하고,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형법 51조(양형의 조건)에 따라 정상참작 감경을 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범인의 연령, 성품과 행실, 지능과 환경 등은 감형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정상참작 감경이 법관 재량에 주로 의존한다는 것. 불우한 환경과 같은 감경 사유의 경우, 대법원이 판례 또는 양형 기준을 통해 불우한 환경에 대한 판단 기준을 명시해놓고 있지 않다. 그러니 판결문에 불우한 환경이라고 판단한 이유를 명시할 의무는 없다.
가해자가 법관 개인 판단으로 감형될 수 있다는 점은 엄벌을 원하는 피해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다. 가해자가 정상참작을 노리고 끊임없이 반성문을 쓸 경우 더욱 그렇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 이현우는 1·2심 과정에서 17차례 반성문, 탄원서,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응해 피해자 김진주(가명)씨도 탄원서 등을 19차례 제출했다. 김씨는 본보 인터뷰에서 "왜 피해자가 아닌 판사에게 반성문을 내고, 판사는 이를 보고 감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법관이 양형 심리 과정에서 피해자 의견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 사건을 많이 다뤄본 문혜정 변호사는 "피고인은 순한 얼굴로 판사 앞에서 울기도 하고 사죄도 하지만, 피고인의 진짜(범행 당시) 모습을 아는 피해자는 판사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적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의견 진술권을 최대한 보장해줘야 법관이 가해자의 서사에 빠지는 불균형이 교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 의견진술권 보장 방법은?
법원도 피해자 의견 진술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양형 기준에 따르면 법관은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 또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피해 회복 △처벌불원에 대한 피해자의 법적·사회적 의미 인식 △피고인의 재범 방지를 위한 자발적 노력 여부 등을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일부 법관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한 경우 선고 전에 피해자 등에게 전화를 걸어 합의의 진정성 등을 확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조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아 법관의 재량이 너무 넓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 이정원 한림대 교수는 "피해자 의견을 충분하게 반영하는 방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등으로 양형기준이 손질되면 국민의 신뢰가 올라갈 듯하다"고 말했다. 법관이 서면만으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피해자의 생활 등을 직접 살펴보는 양형조사관이 증원되거나 외부 전문가 등과 함께 양형 심리 방법에 관한 법관 교육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도 현안 보고서를 통해 "법원의 양형 재량이 법률 내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정상참작 감경의 사유, 정도, 방법 등을 형법에 명시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울권 지법의 한 판사는 "한국은 법정형 정비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세부 구성 요건도 다른 나라처럼 세분화돼 있지 않다"며 "현재 형사법 체계에서는 형량을 자기 책임의 원칙에 맞게 조정하려면 정상참작 감경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이 판사는 "기존 판례와 양형 기준상 특별감경 인자 등이 정상참작 감경 사유를 어느 정도 제한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박준규 기자 ssangkk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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