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누가 책임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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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0여 년 전 서울시에 출입할 때 고건 전 총리의 서울시장 시절 행적을 들어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공무원 특성상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까, 잘못될까 싶어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책임질 테니 따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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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0여 년 전 서울시에 출입할 때 고건 전 총리의 서울시장 시절 행적을 들어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행정의 달인이라든가 보수와 진보 정권을 넘나들며 국무총리를 지내고, 장관으로서 5명의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는 등 관운이 좋다는 것 말고도 새겨들을 만한 얘기가 꽤 있었다. 그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 나온 ‘지자이렴’(知者利廉·청렴한 것이 이롭다는 뜻)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이권 청탁 등 민원을 제기할 것 같은 사람이 방문하면 비서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두고 응대했다고 한다. 부정한 청탁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인상 깊게 들은 건, 직원들이 민감한 사안을 처리하느라 고심할 때는 업무 처리 방향에 대해 직접 친필로 써서 지시하고, 그 밑에는 날짜와 본인 이름까지 적었다는 대목이었다. 공무원 특성상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까, 잘못될까 싶어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책임질 테니 따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오래전 들었던 고 전 총리 얘기가 갑자기 떠오른 건 최근 서초동을 시끄럽게 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1심 선고를 지켜본 후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른바 ‘사법농단’으로 불리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제기된 지 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의 숙원 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했다는 등의 의혹 관련 47개 범죄사실에 대해 구속기소됐지만, 1심 재판부는 ‘통 무죄’를 선고했다. 한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선고 직후 “누가 책임을 져야 하냐”고 물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5년 전 검찰 소환 조사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일로 국민 여러분께 이토록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며 “이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랬던 그는 이번 선고 직후 “명쾌하게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고만 했다.
경영권을 이어받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을 부당한 방식으로 추진하고, 이 과정에서 회계사기를 저질렀다는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회장도 1심에서 무죄 판단을 받았다. 재판부는 “승계 계획은 삼성그룹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강화할 방안을 종합 검토한 것일 뿐이지 삼성물산 주주 등을 희생시키는 약탈적 방법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는 물산과 물산 주주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 회장은 선고 직후 옅은 미소를 남기고 말없이 법정을 떠나갔다.
최종심까지 가봐야 결론이 나겠지만, 이들이 법원에서 무죄 판단을 받았다고 해서 결백하다거나 책임이 없다는 건 아닐 터다. 특수수사 경험이 많은 한 전직 검찰 관계자는 “대기업이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중요한 결정이나 지시사항을 전달할 때는 대개 기록을 남기지 않고, 구두로 할 때가 많다”면서 “따라서 ‘윗선’ 수사에선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어떤 일을 했는지, 왜 했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한 조직을 이끌었던, 이끌어가야 할 수장이라면 도의적으로라도 책임을 지겠다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고 전 총리의 언행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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