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세 늦깎이 감독 데뷔… ‘이름값’을 생각했다
바지사장을 바꿔가며 세금 체납과 폐업을 반복해 탈세하는 범죄 수법을 일명 ‘모자 바꿔 쓰기’라고 한다. 7일 개봉한 영화 ‘데드맨’은 지금껏 다뤄진 적 없었던 바지사장들의 세계를 그린다. 돈을 받고 이름을 팔아넘긴 주인공 만재(조진웅)는 ‘모자 바꿔 쓰기’를 당하고 횡령 누명을 뒤집어쓴 채 중국 사설 감옥으로 팔려간다. 만재는 자신의 이름과 빼앗긴 인생을 되찾기 위해 판을 설계한 배후를 찾아나선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을 공동 집필한 하준원(48) 감독의 데뷔작이다. 지난달 31일 만난 하 감독은 “‘이름값’이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하다 바지사장이라는 소재를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권력자든 자본가든 개개인이든 이름값을 못하고 사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 더 책임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름값’이란 화두를 꺼내게 됐어요.”
5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 조사와 취재로 명의 거래의 세계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바지사장들은 대부분 신분 노출을 꺼려서 접촉부터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시계 업체 사장이었다가, 다음 달에 만나면 신발 공장 사장이 돼 있더라고요. 유흥업소를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지극히 평범한 회사에 아침마다 출근까지 하는 바지사장도 꽤 많았어요.”
하 감독은 “이름은 부모에게 받은 유산이자 평생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 가치를 잊고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이름에 천착하게 된 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 감독은 ‘땡볕’(1985)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 겸 배우 하명중의 아들이자, ‘바보들의 행진’(1975)을 연출한 하길종 감독의 조카다. 어린 시절부터 필름을 자르며 영화 편집을 돕고, 아버지가 운영했던 뤼미에르 극장에서 예술 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어렸을 땐, 아버지 얼굴을 볼 새가 없었어요. 한번은 ‘땡볕’을 찍고 몇 달 만에 집에 오셨는데,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서 알아보지 못한 적도 있었죠.”
아버지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태(胎)’(1986)를 꼽았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제대로 상영하지 못했던 영화는 37년 만에 복원돼 지난해 특별상영회를 열었다. 하 감독은 “한 관객이 ‘영화를 보고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고 하더라. 지금 봐도 젊은 아버지의 영화를 보면서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요즘도 새 작품을 준비하면서 18시간씩 글을 쓰세요.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배웠죠.”
설 연휴를 앞두고 개봉한 데드맨은 할리우드 영화 ‘웡카’ ’아가일’, 국내 영화 ‘도그데이즈’ ’소풍’과 맞붙는다. 흥미로운 소재는 경쟁력이나, 완급 조절 없이 질주하는 연출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하 감독은 “가족들과 명절 음식을 먹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매운 라면도 먹고 싶어지지 않나”라면서 “긴 연휴에 색다른 맛의 장르 영화로 선택지를 넓혀 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내 이름은 무슨 뜻인지, 내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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