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유출 유죄 496건 중 피해액 반영 ‘0건’
美-英-日, 법원이 산정해 형량 가중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의 ‘초임계 반도체 세정 장비’ 핵심 도면을 중국으로 빼돌린 전직 연구원 A 씨에 대해 법원은 지난달 징역 10년의 2심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기술 유출로 인한 피해액에 따른 형량은 0년이었다. 검찰이 피해액을 약 2200억 원으로 추산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액을 명확하게 계산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미국은 법원이 피해액을 직접 산정하고 양형에 반드시 반영하도록 제도화돼 있다. 7일 본보가 복수의 법학 교수, 변호사 등에게 자문한 결과, 미국 법원이 2200억 원의 피해액을 인정했다면 형은 10년 1개월∼12년 7개월 가중됐다. 이는 초범일 경우다. 법률 전문가들은 만약 범죄 전력이 있거나 죄질이 나쁘면 최대 17년 6개월∼21년 10개월의 형이 가중됐을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 연방양형위원회의 양형 기준표에 따르면 기술 유출 범죄에는 최소 징역 0∼6개월이 부과된다. 거기에 피해액 정도에 따라 징역이 가중된다. 초범이고 피해액이 2200억 원이면 징역은 최소 10년 이상으로 늘어난다. 한 법률 전문가는 “재범이거나 해외로 기술이 유출된 경우, 기술 유출범이 범죄의 대가로 돈을 받은 경우는 형량이 더 늘어난다”고 말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 1월까지 기술 유출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496건을 분석한 결과, 법원이 피해액을 산정해 적시한 판결은 한 건도 없었다. 23건(4.6%)엔 피해액이 적혀 있었지만, 이는 장비 절도 등 직접적인 피해액이 있는 경우였다.
美, 기술유출 피해액 따져 33년刑까지 형량 가중… 韓, 반영 안해
[한국, 기술유출 ‘솜방망이 처벌’]
韓, 피해액 산정 못해… 美법원, 시장 가치 등 반드시 반영
英, 국가안보법 적용해 최대 종신형… 日, 전담법원 설치 재산몰수-추징
韓, 피해액 산정 기준-전문기관 없어… “형 적게 살고 큰돈 번다” 먹잇감 돼
하지만 한국은 기술 유출 피해액을 산정하는 전문 기관과 체계가 없어 법원 판결에서 피해액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 한 법원 관계자는 “해당 기술의 가치와 유출에 따른 손실액, 피해 기업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미래 발생할 손실 규모 등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산정해야 하는데, 판사가 참고할 산정 기법이나 기준 등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진다.
반면 미국과 영국, 일본 등은 법원이 기술 유출에 따른 피해액을 산정해 형량에 적극 반영한다. 피해액 산정 기준과 이에 따른 양형 기준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윤해성 한국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한국과 달리 피해액을 양형에 반영하는 것이 강제 규정으로 돼 있다”며 “기술 유출범들은 피해액 산정이 안 돼서 형량이 적고, 형을 살고 나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노려 우리 기업을 먹잇감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했다.
● 美 피해액 따른 처벌 최대 33년 9개월
2021년 미국 테네시 동부 지방법원은 코카콜라에서 영업 비밀을 훔친 혐의로 화학 기술자 Y 씨에게 징역 14년형 및 약 20만 달러(약 2억66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Y 씨가 훔친 기술이 상용화되진 않았지만 법원이 전문가 증언과 피해 자료 등을 바탕으로 Y 씨가 회사에 끼친 피해액을 약 1억2000만 달러(약 1596억 원)로 산정한 결과다.
미국 연방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미국 법원은 ‘범죄 심각성 등급표’에 따라 기술유출 피해액 구간별로 양형에 반영할 가중등급을 30개로 나눈다. 이를 ‘양형기준표’에 대입해 피해액에 따라 최대 36등급을 부여한다. 피해액만으로 최대 405개월(33년 9개월)의 징역 선고가 가능하다.
미국 법원은 △기술 개발 비용 △기술의 시장 가치 △피해자에게 발생한 손실 △범죄로 인해 감소한 기업 가치 △기업의 미래 수익 등을 종합해 기술 유출에 따른 피해액을 산정한다. 윤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기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민간 시장이 발달해 있고, 피해액 산정 방법도 오랜 기간 축적됐다”며 “손실 금액이나 피해자의 수, 범죄 수법의 치밀함, 전과 등에 따라 형량이 크게 달라진다. 피해액을 양형에 반드시 반영해 엄중한 처벌을 내린다”고 말했다.
영국은 최근 기술 유출에 대한 벌금 상한을 아예 없앴다. 지난해 12월 말 ‘국가안보법’을 제정해 국가적 보호가 필요한 정보를 불법 취득해 해외로 넘기려 한 경우엔 종신형과 상한 없는 벌금에 처하도록 명시했다. 영업비밀 등을 빼돌려 국외로 유출하려는 경우에도 최대 14년의 징역 또는 상한 없는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영국은 범죄자의 경제적 이득을 박탈하기 위해 벌금을 크게 높이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은 과거엔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법률이 없어 상표법 등으로 처벌했다. 최대 처벌 수준이 징역 10년에 그쳤지만 당시에도 피해액을 산정해 형량에 반영했다. 피해자가 입은 금전적 손해액을 5개의 구간으로 나눠 형량에 반영하는 식이다.
일본은 기술 유출 범죄 전담 법원을 뒀다. 도쿄와 오사카 지방법원이 일본 전역에서 발생한 기술 범죄 재판을 전담한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2020년 “피해액을 산정함에 있어서 업계의 시세, 해당 정보 자체의 가치, 해당 정보를 이용해 올릴 수 있는 매출 및 이익, 피해자의 영업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기술 범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몰수가 불가능하면 추징을 하는 규정도 있다.
특히 피해액을 산정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영업 비밀이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사에게만 산정 근거를 공개할 수 있는 절차도 갖췄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 소속 A 조사관은 “피해 기업이 법원에서 피해액을 주장하면, 피의자 측 변호인들이 산정 자료를 보여달라고 한다. 피해 기업은 내부 정보가 공개되는 2차 피해를 입는 것”이라며 “이렇다 보니 아예 피해액 자체를 산정하지 않으려는 기업들도 많다”고 지적했다.
● 기업이 산정한 피해액 인정 안 하는 韓 법원
피해액은 범죄자들이 얻은 경제적 이득을 박탈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A 조사관은 “기업들 입장에선 피해액이 산정돼야 나중에 민사 재판에 가서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며 “피해자들은 울고, 범죄자들은 떵떵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선 피해액 산정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은 피해를 본 기업들이 어렵게 피해액을 산정해 가도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2년 국내 한 금속 관련 기업 B사는 직원이 기술을 빼돌려 동일한 업체를 차리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B사는 약 100억 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지만 형사 재판에서 손해액이 인정되지 않았다. 법원이 산정된 손해액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건에 관여한 류정선 법무법인 혁신 변호사는 “전문 기관에서 기술 가치 평가도 받고, 변리사와 회계사 등 전문가들이 감정해서 피해액을 산정했다. 그런데 형사소송에서 재판부는 평가 자체를 믿기 어렵다면서 피해액을 배척했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액이 인정되지 않으면서 형량이 징역 2∼3년에 그쳤다. 지금도 범죄를 저지른 기업은 유출한 기술로 만든 제품을 버젓이 사용하며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장은지 기자 j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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