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민주주의 모범생’ 세네갈 대혼란
아프리카의 모범적 민주주의 국가로 꼽히는 세네갈에서 임기 만료를 앞둔 현직 대통령이 코앞에 닥친 대선을 전격 연기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정치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세네갈 의회는 5일 이달 25일로 예정됐던 차기 대통령 선거를 오는 12월로 10개월 연기하는 법안을 전체 의원 165명 중 105명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3일 마키 살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대선 연기 방침을 밝힌 지 이틀 만에 입법부가 나서 이를 못 박은 것이다. 이후 세네갈 곳곳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5일 수도 다카르에서만 수만 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벌였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강경 진압했다. 세네갈 정부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인터넷 차단 조치까지 취했다.
지난 2012년 집권해 재선에 성공한 살 대통령은 연임 제한 규정 때문에 오는 4월 물러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선이 연기되면서 최소 8개월 권좌에 앉을 수 있게 됐다. 그는 3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지만, 대선이 전격 연기되면서 일각에서는 초법적 조치로 독재자로 변모해 간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1959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세네갈은 대다수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서구식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강제로 권력을 찬탈하는 군부 쿠데타도 겪지 않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까지 두 번 경험했다.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아프리카 민주주의의 보루로도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혼란상은 정파 간 갈등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6월 젊은 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야권 지도자 우스만 손코가 성폭행 혐의로 기소돼 자택연금형에 처해지면서 대선 후보 자격을 잃었다. 지지자들은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려고 누명을 씌웠다”고 반발하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고,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30여 명이 숨졌다. 세네갈 사법 당국은 “손코가 테러리스트 조직과 손잡고 반정부 폭력 시위를 사주했다”며 내란 선동 혐의 등으로 추가 기소하고, 그가 이끄는 정당에 해산 명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살의 오랜 정치적 라이벌 압둘라예 와데 전 대통령의 아들 카림 와데 전 교통인프라부 장관도 지난달 세네갈 헌법위원회로부터 대선 후보 명단에서 제외됐다. 프랑스 이중국적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와드는 “이중국적 문제는 이미 작년에 해결됐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반면 살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인 아마두 바 총리는 후보 자격을 인정받았다.
이렇게 되자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지자 살 대통령이 대선판을 뒤엎고,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려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집권당 후보인 바 총리는 야권 후보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살 대통령은 대선 연기 명분으로 “일부 정치 세력이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대선에 개입하고 있어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불가피하게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지만 시위는 갈수록 격화하는 양상이다.
최근 서아프리카에서는 군부 쿠데타 세력이 집권한 니제르·말리·부르키나파소가 서방과의 협력을 중요시하는 지역 협력체인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를 집단 탈퇴하는 등 권위주의의 확산 가능성이 우려돼 왔다. 이 때문에 역내 민주주의 수호자 역할을 해온 세네갈 사태의 해결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긴급 성명을 내고 “세네갈의 대선 연기가 인권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세네갈의 민주주의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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