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목, 말린 등…몽키숄더의 충격적인 정체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현대인의 하루는 스마트폰 알람을 끄는 데서 시작합니다. 일과의 마무리는 다음 날 알람을 설정하면서 끝이 나겠지요. 그 결과 ‘포노사피엔스(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세대)’라는 신생 인류가 탄생했습니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안구 건조증과 목이 굽어서 펴질 줄 모르는 거북목이라는 부작용까지 생겼습니다.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17세기 위스키 제조 과정에서 등이 앞으로 굽고 어깨가 빠지는 듯한 관절통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증류소에서 위스키의 가장 핵심 원료인 보리를 관리하는 ‘몰트맨’들입니다.
위스키 제조 과정은 크게 몰팅(Malting)→매싱(Mashing)→발효(Fermentation)→증류(Distillation)→숙성(Maturation)의 과정을 거칩니다. 여기서 위스키 제조의 가장 첫 번째 단계인 몰팅을 책임지는 사람이 몰트맨입니다. 몰팅이란 보리에 싹을 틔워 맥아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즉, 보리가 가진 녹말 성분을 추출하는 작업입니다.
1850년대까지는 ‘플로어 몰팅(Floor Malting)’이라고 불리는 공정이 보리를 맥아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몰트맨들의 험난한 일과
보리가 맥아가 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절차들을 거쳐야 합니다. 먼저 보리의 수분 함량이 40~48%에 도달할 때까지 물에 2~3일 불립니다. 물에서 건져낸 보리는 볕이 들지 않는 온돌방 같은 평평한 바닥에 약 30~40㎝ 두께로 펼칩니다. 바닥에 깔린 축축한 보리는 그대로 방치되거나 공기가 안 통하면 고스란히 썩습니다. 이 때문에 몰트맨들은 4시간마다, 쟁기와 삽 등을 이용해 바닥에 있는 모든 보리를 뒤집어 줘야 합니다. 균일하지 못한 삽질은 맛의 불균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굉장히 꼼꼼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보리가 싹을 틔울 수 있는 최적 온도는 16~20℃입니다. 즉, 추운 날씨에는 창문을 닫아, 보리를 따뜻하게 유지해야 하고 더운 날씨에는 창문을 열어 방을 환기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4~5일 동안, 하루 3회씩 반복하면 곡물에 2~3㎝의 싹이 트고 당분이 생성됩니다. 적당히 싹이 난 보리는 열을 가해 건조시켜야 합니다. 싹이 트기 시작하면 보리의 성장 동력인 아밀라아제에 의해 녹말 성분이 전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싹이 튼 보리는 증류소의 파고다 지붕 아래에 있는 가마실로 옮겨 석탄이나 이탄 등을 사용해 건조합니다. 이는 위스키 맛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다양한 향이 배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건조된 보리의 수분 함량이 2%까지 낮춰지면 비로소 맥아가 완성됩니다. 얼핏 보면 꽤 낭만적인 제조법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노동집약적이고 중노동에 가까운 기법이었습니다.
눈 오는 날 제설 작업을 한 번이라도 해보신 분들이라면 바로 눈치채셨을 겁니다. 평생 온종일 수천㎏의 보리를 삽으로 뒤집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아마 없던 병도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수도’로 불렸던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더프타운에서는 ‘몽키숄더’라는 이상한 이름의 병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몽키숄더라는 이름은 실제로 사람의 어깨가 원숭이처럼 점점 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는 일종의 관절염으로 당시 찬바람 쐬며 플로어 몰팅을 했던 몰팅맨들이 감당해야 했던 안타까운 질병이었습니다.
◇몰트맨들의 노고를 기리며 탄생한 몽키숄더
2005년에 발베니가 소속된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는 몽키숄더라는 이름의 위스키를 하나 출시합니다. 몽키숄더를 브랜드명으로 지은 것은 전통 스카치위스키 제조법에 대한 헌사이자 몰팅맨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몽키숄더는 싱글 몰트 위스키끼리만 블랜딩을 한 블렌디드 몰트위스키입니다. 주요 키 몰트로는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발베니, 글렌피딕 그리고 키닌뷰의 원액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병에는 특이하게 원숭이 3마리가 포개져 있는데 이는 각 증류소의 몰트맨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몽키숄더는 숙성연수를 밝히지 않은 NAS(None Age Statement) 위스키지만 저숙성 특유의 알코올 찌르는 맛 없이 매우 부드럽고 밸런스가 좋은 편입니다. 발베니 특유의 바닐라와 꿀이 연상되는 달콤함과 글렌피딕의 상큼한 과일맛이 인상적입니다. 입 안에 남는 대단한 여운은 없지만 편하게 꿀떡꿀떡 넘기기 좋은 위스키입니다.
세계적인 주류 전문 매체 드링크스 인터내셔널(Drinks International)이 발표한 2024년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유명 바 100곳에서 조니워커 다음으로 많이 팔린 스카치위스키가 몽키숄더였습니다. 조니워커는 28%의 지지율로 1등을 차지했으며 몽키숄더, 맥캘란, 글렌모렌지, 시바스 리갈, 라프로익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태생이 칵테일 기주인 몽키숄더가 조니워커 다음으로 전 세계 바텐더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품 중 하나로 꼽힌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하이볼로 타 마셨을 때 유난히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높은 도수에 익숙해지신 분들에겐 알코올 도수 40%인 몽키숄더가 주는 맛이 다소 밍밍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위스키를 접하는 입문자에게는 꽤 괜찮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가격은 4만~5만원대에 구매하면 적당합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플로어 몰팅
한편 현재 대부분의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들은 플로어 몰팅을 중단하고 현대화된 설비를 구축해 사람 손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기계를 사용하는 몰팅이 더 생산적이고 일정한 결괏값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플로어 몰팅을 고집하는 증류소들은 남아 있습니다. 플로어 몰팅만이 주는 독특한 풍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증류소들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전체 몰트의 10~30%에 불과합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라도 전통을 지키거나 증류소를 찾아오는 고객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인 셈입니다. 지금까지 100% 플로어 몰팅을 하는 증류소는 스코틀랜드 캠벨타운에 있는 스프링뱅크 증류소가 유일합니다.
늘 전통과 옛것을 찾아 헤매는 위스키 마니아들 사이에서 플로어 몰팅의 인기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 만든 위스키의 헤리티지를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다고 플로어 몰팅과 기계식 몰팅으로 제작된 맥아의 풍미를 구분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작은 디테일이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오늘은 한평생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맥아를 싹 틔웠던 몰트맨들의 노고를 기려보면 어떨까요. 편안하고 행복한 설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셀린느, 새로운 글로벌 앰버서더에 배우 수지 선정...‘빛나는 존재감’
- “김준수는 마약 사건과 관련 없어… 2차 가해 멈춰달라” 2차 입장문
- [Minute to Read] Samsung Electronics stock tumbles to 40,000-won range
- “주한미군 이상 없나?” 트럼프 2기 미국을 읽는 ‘내재적 접근법’
- 온 도시가 뿌옇게… 최악 대기오염에 등교까지 중단한 ‘이 나라’
- 한미일 정상 "北 러시아 파병 강력 규탄"...공동성명 채택
- [모던 경성]‘정조’ 유린당한 ‘苑洞 재킷’ 김화동,시대의 罪인가
- 10만개 히트작이 고작 뚜껑이라니? 생수 속 미세플라스틱 잡은 이 기술
- 와인의 풍미를 1초 만에 확 올린 방법
- [북카페] ‘빌드(BUILD) 창조의 과정’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