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계만을 위한 게 아니면 불법도 용인되나”
1심 판결 분석 좌담회
경영권 승계 과정 전체를 안 보고 잘게 쪼개 ‘본질 회피’
주목적과 부수적 목적도 구분 못해…대법 판단과도 모순
총수 마음대로 지배구조 바꿀 수 있다는 걸 공인해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것을 두고 ‘본질을 회피한 판결’이라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이뤄진 전반적인 맥락은 배제한 채 사건을 잘게 쪼개 무죄라는 결론에 무리하게 이르렀다는 것이다. 기업의 지배구조를 총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공인해준 판결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생경제위원회,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7일 민변 대회의실에서 ‘삼성물산 불법승계 1심 판결 분석 좌담회’를 개최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좌장을 맡았고, 김종보 변호사(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이동구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 김은정 참여연대 합동사무처장이 발표자로 참여했다.
대법원은 2019년 국정농단 사건 판결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경영권 승계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재판장 박정제)는 지난 5일 ‘삼성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부당하게 이뤄졌다는 검찰의 핵심 공소사실부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종보 변호사는 “이 사건 합병의 가장 큰 목적이 이재용 회장의 지배력 확보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합병의 부당성을 부인한 것은 본질을 회피한 판단”이라고 했다. 검찰이 법원에 증거로 제출한 ‘프로젝트G’ 문건이 ‘(총수 일가의) 물산에 대한 지배력 확대’를 합병 목적으로 내세운 점만 보아도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합병을 고안한 사실이 자명한데도 재판부가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이동구 변호사는 “승계만을 위한 게 아니라면 모든 불법행위가 용인되느냐”며 “합병이 미래전략실 주도로 추진된 승계작업의 일환이라는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판단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려우니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엘리엇은 보호받지만 국내 주주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은 이 사건 합병이 부당하게 이루어져 손해를 입었다며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을 제기했고,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약 1300억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 사건 재판부는 합병에 불법성이 없다고 봤고, 이에 따라 삼성물산 국내 주주들은 엘리엇과 달리 손해를 주장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상희 교수는 “국민 호주머니를 털어서 엘리엇에 돈을 주는 셈”이라고 했다.
김은정 사무처장은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분식회계’가 합병 전후과정에 있어 중차대한 요소인데 재판부가 완벽하게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판결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교수는 “투자의 기본은 예측 가능성인데 재벌 총수의 마음에 따라 기업 지배구조가 바뀔 수 있다는 걸 공인하면 누가 한국의 경제질서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김 변호사는 “이 판결로 다른 재벌 총수들도 자기 돈으로 ‘알짜배기’ 회사 주식을 취득하지 않고, 대주주로 있는 회사를 중심으로 그 회사를 인수·합병하지 않겠냐”고 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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