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손흥민의 ‘캡틴 리더십’
기적은 세 번 연속 일어나지 않았다. 참담한 완패였다. 한국 축구가 7일 요르단에 0-2로 패해 아시안컵 4강에서 떨어졌다. 골키퍼 조현우의 선방이 없었다면 3골쯤 더 내줬을 판이었다. 유효슈팅 ‘0개’ 기록이 말하듯 변변한 득점 기회를 단 한 번도 만들지 못했으니 밤잠 설치며 경기를 지켜본 축구 팬들이 분통을 터뜨릴 만했다.
허탈한 마음인데도 팬들은 주장 손흥민의 소감을 기다렸다. 그의 간절했던 노력을 익히 알고 있어서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 나온 그는 큰 한숨을 내쉰 뒤 “팀을 위해 희생해준 동료들이 고맙다. 많은 응원 해주셔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기대했던 모습을 못 보여드려 국민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귀에 박히는 말을 보탰다. “내가 많이 부족했다. 나를 질책하기 바란다. 동료 선수들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손흥민은 남 탓을 하거나 핑계대지 않았다. 실패의 책임을 모두 제 탓으로 돌리고 동료들을 감쌌다. 연장전 2번 포함해 총 600분.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대회 6경기를 1분도 쉬지 않고 풀타임으로 뛰며 시쳇말로 ‘멱살 잡고’ 4강행을 이끈 그의 말은 묵직했다.
공은 둥글고, 축구는 이기고 지기를 숱하게 겪는 스포츠이기에 경기마다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실력과 전술을 냉철히 진단하고 보강하는 일은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런 평가·분석과 별개로 이번 대회는 ‘캡틴’ 손흥민의 리더십과 품격이 특출나게 빛난 장면들로 돌아볼 수 있겠다.
손흥민은 대회 초반 조별리그에서 부진했던 대표팀 일부 선수를 향해 팬들이 비난을 쏟아내자 “선수들을 흔들지 말고 보호해달라”고 청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16강전에 임해서는 “실수해도 동료들이 있다. 그것만 믿고 나가자”고 팀원들을 독려했다. 16강전 승리 후에는 기쁨을 만끽하기 전에 상대 선수들을 일일이 포옹하며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 경기 연속 연장전 끝에 8강전에서 호주를 꺾고 나서는 “나라를 위해 뛰는데 힘들다는 건 핑계일 뿐”이라고 했다. “경기에 못 나가고 벤치에 있는 선수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이런 손흥민의 진면목을 알아챈 일본축구협회장은 한·일 축구의 차이로 거론하기도 했다. 일본이 이란에 패해 탈락한 직후 “일본에는 손흥민 같은 주장이 없다. 그는 팀에 집중력을 요구했고 끝까지 뛸 수 있는 힘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스페인에서 뛰는 일본 간판 선수는 지고 나서도 “내가 뭔가 반성해야 할 만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니 복장 터질 노릇이었을 테다. 선수뿐 아니라 주장 손흥민의 존재감도 ‘월드 클래스’다.
반면 그동안 말 많았던 위르겐 클린스만 한국 대표팀 감독의 지도력은 이번 패배로 밑천을 보였다. 컨디션 난조인 선수를 제때 빼지 않고 실수로 실점한 뒤에야 공격수로 교체해 수비 부담을 가중시킨 것이 단적인 사례다. 추가 교체 타이밍도 늦었고 특정 선수들만 쉼 없이 경기에 뛰었다. 말하자면 인사 실패다. 실수는 언제든 나올 수 있지만, 실패 상황을 보고도 만회할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건 감독 책임이다. 세계 최강 스트라이커로 일세를 풍미한 클린스만 감독은 그 자체로 전술이고 퍼포먼스였으니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따르게만 하는 것이 그의 리더십 요체인가.
클린스만 감독의 패배 회견도 팬들의 실망과 분노만 키웠다. 그는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면서 ‘분석과 발전’을 하겠다고 말했다. 책임을 피하겠다는 얘기 같다. 일본은 일찍 귀국했다고 말한 건 한국이 일본보다 잘했다는 주장이다. 조별리그부터 어려운 조에 속했다는 말은 요르단이 잘해서 한국이 졌다는 얘기다. 그래도 한국이 16강·8강전에서 드라마를 썼다고 한 건 ‘셀프 칭찬’일 뿐이다. 제 역할과 본분에 대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지도자를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아시안컵 축구를 보면서 리더의 본분을 배웠다. 리더는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리다. 좋은 리더는 확고한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긍정적 사고와 열정으로 조직을 이끌며 책임을 미루지 않는다. 나쁜 리더는 과거 성공했던 경험에 의존해 변화 흐름에 둔감하며 자기 성찰 없이 책임을 떠넘기고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하다. 리더십은 권력이 아닌데 직위 권력으로만 구성원을 이끌려는 사람도 나쁜 리더다. 우리는 늘 조직·사회·국가의 리더를 뽑고 마주한다. 그라운드 밖 세상에 리더는 참 많은데 좋은 리더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 있을지 모르지만, 캡틴 손흥민 같은 리더를 찾아야겠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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