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보다 더 오래된 옛말을 찾아서… “방언학은 인류학이다”

손고운 기자 2024. 2. 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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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두만강 유역 방언 수집한 학자 곽충구 인터뷰… 중국 지린성·중앙아시아 민족 수난사까지 좇아 ‘조선어 방언 사전’ 집필
2024년 1월25일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만난 곽충구 서강대 명예교수. 최근엔 평안도 지역 방언 사전을 집필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민족의 주된 징표가 뭔가. 첫째가 언어죠. ‘그 민족이 어떤 민족이냐’란 곧 ‘그 민족이 쓰는 말이 무엇이냐’.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어 말살정책을 쓴 이유가 그거 아니겠어요?”

2024년 1월25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오래된 아파트에 들어서자 종이책 냄새가 밀려왔다. 노학자는 “담배 냄새와 섞여 미안하다”고 멋쩍게 웃으며 사과를 깎았다. 2019년 4200여 쪽의 <두만강 유역의 조선어 방언 사전>(태학사)을 펴낸 곽충구 서강대 명예교수는 중국 두만강 유역을 22년간(1995∼2016년) 방문했다. 당시 빠르게 모국어와 전통문화를 잃어가던 투먼시·훈춘시 일대에서 조선족 할머니·할아버지들을 만나 3만2천여 개의 조선어 방언을 수집했다. 곽 교수는 인터뷰했던 구술자들이 이젠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기억도 흐려져간다고 말했다.

방언을 고친 동주, 사람들이 몰라도 쓴 백석

—한창 중국 두만강 유역을 오갈 때 느꼈던 감정이 궁금하다.

“서글펐다. 중국 선양에서 14시간 동안 기차 타고 옌지(연길)를 가면서 광활한 벌판을 보거나, 두만강 둑에 앉아 북을 쳐다보곤 할 때면.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민족의 수난사가 떠오르니까. ‘고난의 행군’ 시절 훈춘시 밀강촌에서 어느 할머니 집에 머물렀는데 ‘두만강 바람 쐬고 오겠습니다’ 하니 ‘쉐두 아니 먹는 물으 어때 보자 하암둥?’ 했다. 두만강을 건너다 죽은 탈북민 시신이 떠내려와 그 물은 소도 안 먹는다는 말이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두만강 얼음장을 깨고 탈북한 30대 여성도 기억난다. 돌아보면 심란했다. 시골 출신(충남 아산)인 내가 서울 와서 본 자본주의의 모순, 또 조사하면서 본 공산주의 사회의 열악하고 폐쇄적인 현실. ‘민족 분단의 비극은 언제 끝날까. 왜 이 민족은 대동단결해 통일을 이룰 수 없는가’ 수없이 생각했다. 영하 35도 추위, 두만강 옆을 지나며 봤던 소소하고 아름다운 우리 민족의 정서… 이젠 늙어서 다 잊어가고 있다.”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경신진 회룡봉촌에서 곽충구 교수가 바라보던 두만강변. 곽충구 제공

—왜 그렇게나 사라져가는 육진(함경북도 최북단 여섯 지역) 방언에 매달렸나.

“표준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방언들이 있다. 그 지역만의 독특한 민속을 담은 말들. 그게 사라지면 민속을 지칭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거다. 단어가 사라지면 민속도 사라진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걸 체계화하고 보존하는 일이다. 방언학자는 본디 인류학자다. 친족호칭어를 보면 관계가 드러나고 가옥 구조에 대한 단어는 기후환경을 보여준다. 농경방식, 생활문화… 언어는 그 지역의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를 보여준다. 서양에선 언어지도를 ‘링귀스틱 아틀라스’(Linguistic atlas)라고 하는데, 언어지도를 만들 때 민속 내용을 반드시 추가한다.”

—‘언어가 사라지면 문화도 사라진다’는 건 문학에서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있나. 정승철 서울대 교수가 교수님의 연구를 참고해 ‘윤동주와 함북 방언’이란 논문을 썼다.

“그 논문을 보면 윤동주(용정 명동촌 출생) 동시 ‘봄’의 ‘고양이는 가마목에서 가릉가릉’ 대목에 대한 내용이 있다. 원래 윤동주 시인은 ‘가마목’으로 썼는데, 정병욱 전 서울대 교수(윤동주 친구)가 서울말인 ‘부뚜막’으로 고쳤(홍장학 연구)다는 내용이다. 가맛목의 뜻을 이해하려면 중부 지역의 가옥 구조와 다른 함경도 지방의 가옥 구조를 알아야 한다. ‘가맛목’은 ‘가마(솥)+ㅅ+목’ 구성의 합성어인데, 솥을 걸어놓은 부뚜막과 정지방이 이어진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겨울철 추위가 심한 함경도에선 불을 때 조리하는 부엌과 거주 공간인 방을 분리하지 않고 한 공간에 배치했다. 정병욱 선생은 그걸 부뚜막으로 고친 거다. 그럼 원래 맛을 살릴 수 없다. 아마 ‘가맛목이 뭔지 사람들이 몰라 시적 세계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고쳤을 거다. 그런데 ‘몰라도 좋다’ 하고 방언(평안도 방언)을 막 쓴 시인이 바로 백석이다. 덕분에 그 지역만의 순수하고 향토적인 정서를 최대한 살렸다. 함북 방언은 월북하신 이용악 선생이 많이 썼다. ‘민족 독립 만세’ 같은 직접적 언어를 쓰지 않고 방언을 통해 피폐한 조선 민족의 생활, 민족의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경신진 회룡봉촌에서 제보자들과 사진을 찍은 젊은 날의 곽충구(왼쪽 셋째) 교수. 곽충구 제공

동북아시아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

—함북 방언에는 서울말과 아주 다른 말들도 보인다. 함북 방언 ‘아심태니꾸마’는 어떻게 ‘고맙습니다’와 같은 뜻인가.

“나름대로 긴 역사가 있을 거다.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의 ‘안심찮다’에서 온 말이지 싶다. 선물을 받아 고맙다는 말을 전할 때 ‘당신한테 이런 걸 받기가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 편할 ‘안’과 마음 ‘심’이 합쳐져 안심이다. ‘안심하디 아니하다’의 준말. ‘꾸마’는 그 지역의 독특한 종결어미. 여기서 ‘안심하디’가 ‘안심티’가 된 건데, 옛날 말이니 구개음화가 안 된 거다. 함북 방언에선 ‘짧다’를 15세기처럼 ‘댜르다’라고 한다.”

—그 지역 문화를 이해하려면 음운론적 연구가 중요하겠다.

“당연하다. 음운·형태 분석 없이는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고, 사전을 만들 수도 없다. 특히 함북 방언에는 세종대왕 때보다 더 오랜 옛말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독일 언어학자 요하네스 슈미트가 말한 ‘언어 파동설’로 설명할 수 있다. 호수에다 돌을 하나 던지면 파동이 일어난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언어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곳은 대체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다. 돌을 던졌을 때 물결이 퍼져나가듯 이 변화는 퍼져나간다. 그런데 두만강 유역은 우리 영토의 최북단 산골짜기였다. 파동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변화가 도달하지 못한 거다. 그래서 옛 언어의 잔재가 남아 있단 뜻으로 이런 곳을 ‘잔재 지역’이라 한다. 육진은 ‘세종대왕의 4군6진 개척’ 때 신하들도 춥고 주민 없는 땅이라고 격렬하게 개척에 반대했던 땅이 아닌가.”

<두만강 유역의 조선어 방언 사전> 표지.

—저서 <중국 길림성 이주 한인의 언어와 구전 설화>를 보면 결혼·양육·놀이·농사 등 생활 문화를 들려주던 구술자분들 모습이 들어 있다.

“그 책에 등장하는 구술자 할머니·할아버지 가운데 박남성 할아버지(1935년생)를 참 오래 만났다. 19년간 만나고 안부 편지도 보내곤 했는데, 3년 전 돌아가셨다. 그 세대 조선족은 참 민족의식이 강하다. 거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혼혈족이 많아져 민족 순수성이 흐려지는 게 걱정’이라고 하시더라. 조선족이 한족이랑 결혼하는 걸 우려하시면서. 지금 젊은 세대는 중국 교육을 받아 역사 인식이 완전히 다르다. 서강대에서 수업할 때 동포 학생에게 밥을 사줬는데 ‘중국과 합병’ 이런 얘길 하기에 신채호 선생의 민족주의 사관이 발동해(웃음)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받았지만 한 번도 굴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세대가 넘어가며 인식이 바뀌었다. 이젠 ‘한화’(중국화)가 완성된 거다.”

2024년 1월25일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만난 곽충구 서강대 명예교수. 김진수 선임기자

대동여지도를 들고 토박이를 찾아서

—젊은 날부터 국내 방언 조사는 물론이고 중국어·러시아어도 익히며 이주민 언어를 조사했으니 에피소드도 많았겠다.

“젊은 날 국어교사 생활을 아주 잠깐 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방언조사원’ 일을 했을 때 엄청 큰 가방을 메고 다녔다. 녹음기, 테이프, 마이크로폰, 옷가지. 교통은 또 얼마나 안 좋았나. 조사는 이런 식이다. 조선오만분일지도와 대동여지도를 들고 특정 지역을 간다. 기관에서 고향 말이 가장 많이 보존된 마을을 확인하고, 그 마을 이장을 또 찾아간다. 그 마을 이장이 적정한 제보자를 소개해준다. 구술자를 구할 땐 조건이 많다. 마을 토박이이면서, 교육을 너무 많이 받지 않았고, 발음 때문에 치아 건강도 좋아야 하고, 외지 경험이 없어야 하는 등. 찾아갔는데 적절한 구술자가 아니면 실패.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고. 찾고 나도 하루 8시간 그 사람과 대화하면서, 1700개 항목을 질문하곤 했으니. 20년 넘는 세월 동안 특별한 경험이 많았다. 간첩으로 오인받아 신고당한 적도 있다. 중국 당서기 집에 머물 땐 북한 방송도 봤다. 눈 쌓인 경사면에서 차가 미끄러졌는데 나무에 뒷바퀴가 걸려 살기도 하고, 전염병에도 걸렸다. 사전을 집필할 땐 망막이 찢어지고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

곽충구 교수가 방언 조사 당시 녹음기·테이프 등 장비를 넣어다니던 가방. 최근 한글박물관은 곽 교수가 사용한 장비 및 기록들을 관련 전시를 위해 대여해갔다. 곽충구 제공

—너무 힘들 땐 그 옛날 한국어를 연구한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1873년생 핀란드 외교관·알타이어학자)나 조선어 방언사전을 쓴 오구라 신페이(일제강점기 언어학자)보단 덜 힘들 거란 생각을 하며 버텼다고.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오구라 신페이는 물론 대우는 잘 받았겠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산길을 가는데 터벅터벅 걷고, 말 타고, 지게도 타고 그렇게 죽는소리하면서 제주도에서 함경북도 끝까지 돌았다. 람스테트는 더하다. 우랄알타이어 연구하느라 몽골·만주·터키·러시아 남부를 돌아다녔는데 그 일곱 차례 동방여행 동안 온갖 고생을 했다. 몇 달 동안 조사한 자료를 시베리아 화물열차에서 도난당하기도 하고. 베른하르드 칼그렌이란 19세기에 태어난 스웨덴 언어학자는 중국을 다니면서 방언 조사를 했는데 지금도 중국 언어, 민속, 인류학 자료로 아주 소중하게 쓰이고 있다.”

—방언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는 많이 있나.

“잘 없다. 국어학 연구자가 잘 없다. 비싼 등록금 내고 논문 쓰고 박사가 되면 진로가 있어야 하는데 대학은 쇠퇴하고 있고 자리가 없으니까. 인문학은 소멸 위기가 아니라 절멸 위기다. 개인적으론 방언 연구가 동물학·식물학·민속학 연구자들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연구하면 좋을 텐데 지원은 없고, 그게 다 돈이니까. 중국 지린성(길림성) 이주 한인,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이주 한인에 대한 책도 ‘박승빈 국어학상’ 상금 중 500만원을 기부하고 남은 돈으로 직접 출간했다.”

곽충구 교수가 중앙아시아 이주 한인의 방언을 조사하고 있다. 곽충구 제공

소멸 위기 아니라 절멸 위기인 인문학의 나라에서

—어떻게 이리 방대한 사전을 집필했는지 궁금했는데, 휴대전화가 없단 얘길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안 썼나.

“없었다. 그래서 은행이나 이런 델 가면 휴대전화를 보라고 하는데 난 휴대전화가 없어서 혼난다.”

—왜 그렇게 했나.

“세상사 안 보려고. 평생 시골 산골짜기나 그렇게 오랫동안 다녔으니, 쉽게 말하면 미련 바보다.”

글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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