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매화 피는 철이면
생각나는 글이 있다. 소싯적 아르바이트로 읽은 이빈국(1586~1653)이라는 사람이 쓴 ‘매화설’이라는 글이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을 전부 겪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격변기를 살아간, 좀 불우한 시대의 사람이다. 개인적 삶으로 봐도 그렇게 잘 풀린 인물은 아니었다. 음서로 능참봉(종9품의 미관말직)을 제수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하긴 했으나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과거 급제를 못했기 때문인데, 초반 시험까지는 그럭저럭 붙었으나 꼭 막판 한고비를 넘지 못했다.
음서로 얻은 이러저러한 말직을 전전하던 차, 환갑에 접어드는 인생 말년에 드디어 이천현감이라는 그럴싸한 자리를 얻게 됐다. 지방 수령직 중에서도 현감은 종6품으로 가장 낮은 관직이긴 하지만 그래도 임금을 대신하여 한 고을을 다스리는 일이다. 천하의 근심을 함께하는 사대부에겐 자신의 경륜과 능력을 펴볼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시험장 정도는 되는 자리였다. 책에서 읽은 대로 좋은 정치를 펼치겠다며 벅찬 가슴을 안고 현감직에 나섰으나 현실은 각박했다. 뭔가를 미처 해보기도 전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파직이 되어버린 것이다.
터덜터덜 고향에 돌아오니 더욱 화딱지 나는 일이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벼슬살이하는 동안 갖고 다닐 수 없어 아들내미에게 맡겨놓은 매화 화분이 다 시들어버린 것이다. 나무 자태가 아름다우면서 꽃도 아름답고 향도 좋아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화분인데, 이 무심한 자식놈들이 다 죽여놓다니 열불이 날 지경이었을 것이다. 혹시 소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빈국은 그런 기대로 화분 속 매화를 담장 옆 땅에 옮겨 심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땅에 옮겨 심은 매화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기 시작하더니 여름 한철을 지나서는 키가 몇길은 될 정도로 훌쩍 커버린 것이다. 이걸 보고 탄식했다. 화분에 있을 땐 작던 매화가, 돌봐주지 않으니 말라 죽는 듯했다가 제대로 된 흙을 만나자 이렇게까지 크는구나. 결국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때와 운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여기까지였다면, 이 글은 나에게 그렇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변변한 벼슬도 못한 자신이 제대로 된 때와 운을 못 만나서 그런 거라고 매화에 빗대어 얘기했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그냥 흔한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나서!’ 유의 불평 아닌가. 그런데 이빈국은 여기에서 한번 더 생각했다. 때와 운이 중요하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매화 안에 이렇게 클 만한 자질이 있었다는 게 아니겠나 하는. 결국 ‘내가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그만큼의 자질이 부족했던 거겠지’ 하는 얘기다. 이 담담한 어조가 내 마음에 훅 들어왔다. 이 사람이 진짜 자질이 있었는데 시운을 잘못 만난 것인지, 자질이 없었는지 사실 이제 와선 알 수가 없다. 모든 불우한 사람이 자질이 부족한 것도 아니기에 이것이 어떤 정밀한 분석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생 제대로 펴지 못했다고 불만이 그득해질 수도 있는 노년에, 자기 마음을 다스려 ‘자신’을 지킨 한 사람을 읽을 수 있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이나 시운을 탓하기보다는 나를 탓하고, 일이 술술 풀려 잘나갈 때엔 다 남의 덕이요, 시운을 잘 만난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물론 사회구조를 분석할 때는 이렇게 하면 안 되지만, 개인의 차원에선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처지에서건 적어도 ‘인간적으로 괜찮은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러지 못하고 저놈보다 내가 나은데 세상이 안 알아준다느니, 내가 잘난 건 다 내 능력 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글부글한 원한과 욕망을 참지 못하고 나대기 시작하면, 그 사람도 망가지고 그걸 보는 사람들도 피곤해진다. 그런 맘이 들 것 같으면 딴짓 말고 그냥 매화 화분 하나씩 키우자.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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