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비행사의 금의환향, 100년 전 호남 상공 날았던 이상태

2024. 2. 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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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고향인 호남 상공을 누볐던 비행사가 있었다.

16세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3년 만에 삼등비행사 자격을 얻은 그는 21살 나이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해 고향의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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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16살 때 日 건너가 3년 만에 삼등비행사 자격 공중돌비(突飛) 등 탁월하고 놀라운 조종능력 비행기 몰고 최초로 목포 상공 날아 시민 열광 식민지 시절 고향 사람에게 꿈과 희망 심어줘

100년 전 고향인 호남 상공을 누볐던 비행사가 있었다.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 출생의 이상태(李商泰)다. 16세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3년 만에 삼등비행사 자격을 얻은 그는 21살 나이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해 고향의 하늘을 날았다. 고향 사람들은 이 젊은 파일럿에 열광했다. '자랑스러운 비행사' 이상태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떠나 본다.

"전라남도 장흥군 출생의 3등 비행사 이상태 군은 2월 10일부터 고향 방문 비행을 실행하기 위하여 월전부터 준비 중이던 바, 관민이 협력하여 아래에 쓰인 날자로 이 군의 용장(勇壯)한 자태는 고향의 하늘에 높이 날게 되었다. 이 군은 방년 21세의 청년으로 기술이 풍부한 청년 비행가이다. 이 군은 1919년에 일본에 가서 일본대학 중학과에 입학하여 동교 3학년까지 마치고 1922년 4월에 지바(千葉)시 백호비행장에 입장하여 1922년 12월에 3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이듬 해 1923년 6월에 조선인으로는 안창남(安昌男) 군과 두 사람이 일본 비행 경기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작년 12월에 일본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서 고국 방문 비행을 준비하던 바, 광주(光州) 관민의 열렬한 후원으로 그 소지(所志)를 달성하게 되었는데 이곳 인사들은 과학적 비행 기술의 기묘한 것을 보고자 매일 손을 꼽아 기다린다더라. 비행사 이상태의 이번 고향 방문 비행은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다섯 번에 걸쳐 광주, 나주, 목포, 강진, 장흥 등지를 비행하는 것이다."(1924년 2월 7일자 동아일보)

신문에는 연일 이상태에 대한 기사가 나오고 있다.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 출생 이상태 씨는 5년 전에 동경에 건너가 지바시 백호 비행장에서 수업하여 3등 비행사로 있다가 수 개월 전에 2등 비행사 시험을 치렀는데, 이씨는 가장 높이 뜨는 85마력의 '솟삐-스'호 비행기를 가지고 1월 하순 경에 관민 유지의 후원 아래 향토 방문비행을 거행할 터인데, 그때에 광주(光州) 천공(天空)으로부터 높이 날아 전남 각지를 방문할 터이라더라." (1924년 1월 8일자 매일신보)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 본적을 둔 비행사 이상태 씨의 연령은 금년에 21세인데 16세에 장흥소학교를 졸업하던 즉시에 동경으로 건너가서 적판(赤坂)중학교에 입학하여 두 해 동안을 공부하다가, 18세에 그 학교를 그만 두고 여러 가지 학술을 연구하였다 하며, 항상 용맹스러운 기상으로 말 타기를 좋아하며 또 모험적 사업을 하고자 하던 바 마침내 1922년 4월에 지바(千葉)시 백호(白虎) 비행장에 들어가서 비행 기술을 공부하여 1922년 11월 하순경에 3등 비행사가 되었고, 작년 4월에 백호(白虎) 비행장에서 개최한 현상(顯賞) 비행대회에 안창남(安昌男) 씨와 같이 참가하여 공중에서 돌비(突飛)하는 수단을 보였으며, 그는 비행기 '솟삐-스'호를 사 가지고 최고 비행가로써 해군이 사용하는 '루-론' 85마력으로 공중에서 나르는 기술을 사람마다 깜짝 놀라지 아니 할 수 없다더라."(1924년 1월 12일자 매일신보)

드디어 이상태는 1924년 2월 13일 목포 하늘을 향해 비행을 시작하게 된다. "전남 장흥군 출생 이상태 군은 이번에 자기 고향되는 장흥에 돌아왔는데…(중략)… '향토 방문 대비행'을 개최하고자 순서에 응하여 광주(光州), 나주(羅州), 영산포(榮山浦) 등지에 각기 비행 일자를 결정한 바, 지난 11일이 목포에서 비행할 일자가 되었으나 13일 역시 일기 불순과 그 외에 여러 가지 형편에 의하여 13일로 연기가 되었었는데, 그날은 북풍이 맹렬하고 눈이 내려서 오히려 삼동(三冬) 일기보다도 몇 갑절 더 추우므로 또 다시 연기나 아니 될까 하여 염려를 하였었는데…(중략)…거의 3만의 목포 시민과 각 군(郡)에서 회집한 학생들은 오전부터 시내 공립여자고등학교 광장 및 유달산록에 구름같이 인산인해(人山人海)가 되어 모두 공중을 바라보고 기다리던 차에, 오후 3시 40분에 이 군은 솔개와 같이 천공(天空)에 높이 떠서 박수갈채 속에 목포 시내를 일주하고 하륙(下陸)하는 동시 불행히 장소가 협착(狹窄)하므로 비행기 전면이 땅에 박혀 일시는 경동(驚動)이 되었으나, 다행히 이 군은 별로 부상함이 없으며 기계가 약간 파손이 되었으므로 그 이튿날 되는 14일에 공중 비행을 중지하였다더라."(1924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당시 조선인 비행사는 몇 명이나 되었을까. '조선인 비행사 합하여 13명'이란 제목의 1927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참조해 보자. "조선인으로 일본 체신청 항공국에서 비행사 시험에 합격된 사람은 지금까지 전부 13명인데, 지난 5월 5일 현재로 등수와 성명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더라. 1등은 안창남(安昌男)과 장덕창(張德昌), 2등은 이상태(李商泰), 3등은 민성기(閔成基), 권태용(權泰用), 박경원(朴敬元·女), 강우양(姜愚陽), 서웅성(徐雄成), 신용인(愼鏞寅), 이창균(李昌均), 정재섭(鄭再燮), 김치간(金治간), 이수복(李壽福)이다."

이들 조선인 비행사들은 1924년에 일본 동경에서 '조선비행사 구락부'를 창립한다. 총 14명의 조선 비행가들로 구성됐다. 이 중 박경원, 이정희(李貞喜) 등 2명의 여성 비행사가 눈에 띈다. "연년(年年)이 늘어가는 조선인 비행가들 사이에 친목과 단결과 지도 장려를 목적으로 하고 지난 9일 동경부 하립천정 모처에 동지가 모여 조선비행구락부를 조직하고 규약을 통과한 후 임원을 선정하였다는데, 현재의 조선 비행가는 14명이라더라."(1928년 12월 14일자 동아일보)

박경원은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민간여성비행사였다. 대구 신명여학교와 일본 요코하마 기예 여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 박상훈이 의사로 근무하던 대구 자혜의원에서 2년간 간호사로 일했다. 1925년 가마다 일본 비행학교에 입학해 1926년 졸업했고 1928년 2월 비행사 자격증을 땃다. 그는 일본에서 만주까지 비행하는 계획을 가졌다고 한다. 1933년 일본에서 조선으로 비행하다가 일본 시즈오카현 상공에서 추락사했다. 향년 36세였다.

사람이 성공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부귀해졌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것, 즉 '금의야행'(錦衣夜行)과 같다고 초나라 항우(項羽)는 말했다. 출세했다고 보란 듯이 뻐기는 것이 금의환향은 아닐 것이다.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금의환향' 물결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비단옷으로 자신을 포장해 고향일꾼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 실정이다. 수많은 고향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 진정한 금의환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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