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미리 맞으며

한겨레 2024. 2. 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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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태어난 새끼 유산양. 원혜덕 제공

[똑똑! 한국사회]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입춘이 지났다. 그래도 여전히 눈이 날리고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낮에는 문득문득 따사로운 햇볕이 온 누리를 덮는다. 2월은 겨울과 봄 사이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씨앗을 넣는 것으로 이른 봄맞이를 한다. 첫번 파종으로 고추씨앗을 넣었다. 가지도 조금 씨를 넣었다. 고추는 씨를 넣고 90일이 되어야 밭에 내다 심을 수 있을 만큼 자란다. 모종으로는 가장 더디게 자라는 작물 중 하나다. 더는 서리가 내리지 않는 때 심어야 고추가 얼어 죽지 않으므로 만상일(끝서리 내린 날)이 지나는 5월 초에서 거꾸로 석달을 거슬러 올라 날짜를 계산하면 이맘때가 된다. 고추씨를 하루 따뜻한 물에 담가 두었다가 건져서 흙에 섞어 모판에 골고루 뿌렸다. 모판에 흙을 깔고 그 위에 고추씨를 뿌리고 다시 얇게 흙을 덮은 뒤 건조기에 넣고 싹이 트기를 기다렸다. 4일 뒤 싹이 올라왔을 때 미리 만들어서 온도를 높여놓은 온상에 고추모종을 넣었다.

밖에는 눈이 펄펄 날리는 날인데도 이렇듯 첫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바깥에 있는 온상에 넣고 나면 봄을 마중하는 느낌이 든다. 온도가 오르는 낮에는 비닐과 보온덮개를 걷어주고 밤에는 다시 덮어준다. 모종 기르는 일을 업으로 하는 농가에서는 온도와 습도를 맞춰주는 시설과 장치가 있겠지만, 일반 농가에서는 이렇게 모종을 기른다.

상추, 봄배추, 양배추, 브로콜리 등 잎채소 씨앗들도 다음주에는 포트에 넣을 것이다. 잎채소들은 대체로 추위에 강해 오이, 고추, 호박 같은 열매채소들보다 일찍 모종을 밭에 심는다. 여기 포천은 4월 중순에 들어서면 잎채소를 내다 심는다. 밭에 옮겨 심고 난 뒤 느닷없이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어린잎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고 뻣뻣해져 있어서 얼어 죽은 게 아닌가 하고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돋은 아침해의 따스함을 받고 다시 살아난다.

올해 첫 파종. 고추씨를 모판에 넣고 있다. 원혜덕 제공

외양간에서는 어미 유산양들이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지금 나오는 녀석들은 좀 성급했다. 조금 더 기다려 날이 풀렸을 때 나오면 살아가기 좀 더 편할 텐데 말이다. 그렇지만 인위적으로 출산 시기를 조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을이나 한겨울에 태어나지는 않는다. 봄이 시작될 무렵, 그리고 본격적으로 봄이 됐을 때 새끼 유산양들은 태어난다. 봄이 오면 들판에 영양가 있고 맛있는 풀이 파랗게 올라와 덮일 테니 그 풀을 어미가 뜯어먹으며 새끼를 잘 기를 수 있다. 젖을 뗀 새끼도 같이 풀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다. 이제는 사람이 돌보며 먹이를 챙겨주기에 들판에 풀이 나오든지 아니든지 자기들 생존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어미 유산양에게는 자연에서 봄에 새끼를 낳고 기르던 본성이 남아 있어서 이렇듯 자연의 때에 맞춰 새끼를 낳고 기른다. 똑같이 사람 손에 길들여졌지만 개, 돼지, 소 등은 이미 그런 능력을 상실했는데,사람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아직 봄에 새끼를 낳는 유산양들을 보며 자연의 순리를 느낀다.

요즘은 농촌에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생육조건에 가장 적합하도록 온습도, 일사량, 냉난방 등을 조절하는 ‘스마트팜’이 유행이다. 정부가 적극 권장하며 지원도 하고 있다. 노동력을 덜어주고 작물 재배에 맞는 조건을 만들어줄 필요는 분명 있지만, 스마트팜만이 우리 농촌이 살 수 있는 길이요, 대세라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겨울에도 채소가 나오고 심지어 토마토, 딸기, 오이 등 열매채소가 1년 내내 밥상에 오르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둘러보면 아직 철 따라 밭을 갈고 농사하는 사람이 더 많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는 대다수의 농부를 정부는 왜 쳐다보지 않는지 모르겠다. 큰 비용 들여 스마트팜을 시작한 많은 젊은 농부들이 부채에 허덕이는 문제는 접어두고 하는 말이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작물을 기르는 농부가 기쁨과 보람을 갖고 살 수 있는 세상은 꿈만 꾸어야 하는가. 농정이 농정답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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