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철도공약은 문제다
노선연장, 철도 지하화 잇따라 제안
사회개혁 비전 없는 선거 아쉬워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기차는 학교, 병원, 교도소 등과 함께 근대화와 문명화를 상징한다. 강원 정선 출신의 인문학자 고미숙은 교각 위를 통과하는 기차들을 지켜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한 글에 “산과 산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기차의 그 엄청난 힘과 속도, 최남선이 ‘경부철도가’에서 ‘바람처럼 빠르고 나는 새와 같다’고 한 기차의 위력을 (중략) 나는 온몸으로 체험하곤 했다”라며 근대화 경험담을 남겼다. 한산 이씨 집성촌인 충남 보령 출신 소설가 고 이문구의 연작소설집 ‘관촌수필’의 첫머리에는 철도와 관련된 묵시론적 장면이 나온다. 작가의 분신 격인 화자는 성묘를 위해 20년 만에 고향을 찾는데 마을을 지키던 400년 된 왕소나무가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린다. 화자는 ‘(노송 앞으로) 철마가 지나가거들랑 한산 이씨 자손들은 이 고을을 떠야 하리’라는 말을 남겼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철도(장항선)가 상징하는 문명의 도래와 대비되는 사라진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전통 질서에 대한 향수를 환기시키는 장면이다.
이처럼 양가적 의미가 있지만 기차와 철도는 산업화 시대에 대체로 좋은 것, 진화된 것, 새로운 것으로 규정지어졌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기차의 시대는 끝났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실감할 수 있다. 철도 관련 공약은 선거의 단골 메뉴다. 4〮10 총선을 앞두고 이런 일은 되풀이되고 있다. 신년 벽두부터 대통령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일부 노선의 착공 세리머니를 했고, 설이 분분하던 3개 노선의 구체안도 공개했다. 2030년대 중반 이후까지 계획된 노선도를 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펼쳐진 인천, 춘천, 동두천, 아산이 급행 대(大)철도로 연결된다. 여기에 총선을 이끄는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은 서울, 수원, 대전역 인근 철도 지하화를 약속하면서 개발 특수를 노리는 세력의 기대감을 자극하고 있다. 물론 철도 공약이 여당의 전유물은 아니다. 국토교통부 캐비닛 속에서 잠자고 있던 GTX계획안을 구체화해 기공식을 진행한 건 문재인 정부(2018년 12월) 때다. 여당이 철도 지하화를 총선 공약으로 내밀자 야당은 규모를 더 키운 철도 지화하 카드로 맞불을 놓았다.
강이 없어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게 정치인들이지만, 이번 총선 철도 공약의 타당성은 의심스럽고,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해 보인다. 정부가 공약한 GTX 사업에만 40조 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된다. 1기 노선만 해도 사업비 증가로 진척이 더딘 상황임을 감안하면 장밋빛 미래는 머지않아 회색으로 변할 수도 있다. 설사 이 사업이 성공해 수도권 도시 거주자들의 서울 접근성이 높아진다 해도 비수도권 주민들의 박탈감은 어찌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철도 지하화는 공허한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여당의 공약에만 50조 원, 야당의 공약에는 80조 원이 들어간다. 정부는 재정투입 없이 민자를 유치하겠다지만, 2007년 대선 때부터 제시됐던 공약이 지금까지도 지지부진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선거 때마다 쏟아지는 노선연장, 철도역 건설 공약이 유야무야된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선거는 정치세력 간 생존경쟁의 장이겠지만, 정치세력이 유권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여주고 의제를 제시하는 기회도 된다. 철도나 공항 건설 같은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공약을 굳이 토건세력의 새 먹거리 찾기식으로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구위기 대응, 경제 규모에 걸맞은 복지시스템 구축, 노동체제 개혁 등 선거를 통해 공론장에서 논의되고 정치적으로 경합해야 할 담대한 의제들과 비교하면 그 상상력은 왜소하고 가난하다. 정녕 철도 공약 말고는 없을까.
이왕구 지역사회부장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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