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얼굴 쓰다듬는 순간 … 포성이 울렸다

김상준 기자(kim.sangjun@mk.co.kr) 2024. 2. 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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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김상준 기자
가자전쟁 현지 르포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사망자 360명이 발생한 레임 음악 축제 현장에서 이스라엘 시민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레임(이스라엘) 김상준 기자

"삼촌 2명과 이모 2명이 함께 살해됐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2㎞ 떨어진 이스라엘 남부 키부츠(집단공동체) 비에리. 6일(현지시간) 이곳에서 만난 엘라(19·여)는 일가족이 몰살된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줬다. 이날은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4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매일경제는 대한민국 언론사 중 유일하게 전쟁의 시발지인 이스라엘 남부를 찾았다. 엘라의 일가족은 1926년 비에리에 키부츠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었다. 그의 가족은 가자 주민과 공생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100년 가까이 키부츠를 지켜왔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진 지 4개월 만인 지난 7일. 이스라엘 남부의 또 다른 키부츠인 레임 인근 음악축제 현장에서 만난 군복 차림의 알라마(19·여)는 한 여성의 사진 앞에서 울고 있었다. 들썩이는 어깨는 1분에 한 번씩 울려대는 포성 속에서 더 크게 요동쳤다. 알라마 친구인 샤이(22·여)도 옆에서 사진을 쓰다듬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지난해 10월 7일 음악축제에 왔다가 하마스에 의해 살해당한 이들의 친구 카린이다.

"넉달 지났지만 가슴 찢기는 분노 … 이스라엘, 집단 트라우마 빠져"

골목엔 인질 136명 몽타주 이스라엘軍 "인질 31명 사망

이미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아랍인 혐오 분위기 고조

가자지구에 대한 믿음은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엘라의 집은 박격포 공격으로 버려진 공장처럼 폐허가 됐는데, 다른 집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주택의 지붕이 파괴됐고 내부는 화기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벽에 남은 둥그런 박격포 충격 자국, 화재로 구부러진 텔레비전, 짐을 싸다 만 캐리어와 널브러진 신발들이 그날의 악몽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에리에서는 습격 당일에만 주민 100명이 사망하고 26명이 인질로 끌려갔다.

엘라 곁에 서 있던 샤이는 "아직도 가슴이 찢어지는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하마스는 기습 첫날 1200여 명을 살해하고 250여 명을 인질로 잡아 가자지구로 끌고 갔으며 136명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공포와 불안이 새겨 있었다.

가자지구에서 1㎞ 거리에 있는 이스라엘 남부 도시 스데로트에서 만난 40대 여성 기티는 자택 대피소에 숨어 한 손에 식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 네 살 딸의 입을 틀어막았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를 받고 있다는 그는 "이 나라 전체가 PTSD를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은 소규모로 커뮤니티를 이뤄 살아간다. (하마스에 의해) 죽거나 잡혀간 사람이 모두 가족이거나 이웃"이라며 한숨 쉬듯 단어를 내뱉었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하마스가 끌고 간 인질 가운데 31명이 사망한 것으로 판정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군 수석 대변인인 다니엘 하가리 소장은 이날 저녁 브리핑 도중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가자지구에 억류된 인질 가운데 31명이 사망 판정을 받았다. 이미 가족들에게도 통보된 상태"라고 말했다.

29명은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로 끌려간 사람이고, 나머지 2명은 2014년 하마스에 살해되거나 납치된 병사라고 설명했다. 이보다 더 많은 50명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 언론도 있었다.

매일경제가 가자지구 인근인 이스라엘 남부지방을 찾은 이날, 중동을 순방 중인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비행기가 텔아비브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장에서는 이스라엘·하마스 간 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분위기였다. 휴전 협상 중재자인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는 전날 하마스가 이스라엘과의 휴전 및 인질 석방 제안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도 "휴전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두 국가 해법',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수교, 인질 즉각 석방 등 여러 가지가 한데 뒤엉킨 협상이었지만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에게서 팔레스타인과 공존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스라엘인과 결혼한 뒤 텔아비브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교포 김순이 씨(45·여)는 "이스라엘 지인과 대화할 때 예전에는 반전이나 공존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런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세계적인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지난해 10월 17일~12월 3일 이스라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팔레스타인과 지속적인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는 응답이 74%로 2017년 이후 최고치로 나타났다.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한다'는 응답도 25%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인 텔아비브에서는 아랍인을 향한 혐오가 고개를 들고 있다.

김씨는 "인근 식당에서 일하던 팔레스타인 직원이 작년 10월 7일 이후 곧바로 해고됐다"고 말했다. 실제 텔아비브의 유명 관광지이자 식당이 몰려 있는 자파는 '유령 도시'가 됐다. 자파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한 아랍계 이스라엘인은 "전쟁 직후 '아랍인이 운영하는 상점은 가지 말자'는 여론이 형성됐는데 그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존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텔아비브 예술박물관 앞에 조성된 '인질들의 광장'에서 만난 매뉴엘라(60·여)는 "하마스를 진정 약화시키는 방법은 팔레스타인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며 "억압을 완화해야 한다. 분노는 분노만 낳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발발 한 달째부터 매일 피켓을 들고 광장에 나왔다.

'인질 석방 촉구, 전쟁 중단'이 그가 요구하는 바다. 몇몇 젊은이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포옹을 했다. 키부츠 비에리에서 만난 '피해자' 엘라의 마지막 말을 주목할 만하다. "저는 그러나 아직 평화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지도자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비에리 / 레임(이스라엘) 김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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