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 경쟁 그만, 이익이 우선"… 주력사업도 쳐내는 日기업
◆ Big Picture ◆
저성장기 일본 기업의 생존 전략 여섯 가지 중 두 번째는 경쟁력을 상실한 사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신사업을 개척한 것이다. 작년 12월 일본 전자 기업 도시바가 상장폐지됐다. 반면 도시바와 100년의 라이벌로 불리던 히타치는 주가가 버블기의 고점을 경신했다. 사업 영역이 유사했던 두 기업은 2008년에 사상 최악의 실적을 내면서 위기에 처했다.
2015년에 분식회계가 발각되면서 위기가 심화된 도시바와 달리, 히타치는 2014년 결산에서 사상 처음으로 6000억엔이 넘는 영업이익을 달성한 후 최근에는 7000억엔 이상의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 위기에 처했던 것은 두 기업 모두 마찬가지였는데, 무엇이 두 100년 기업의 명암을 갈랐을까? 히타치는 도시바가 하지 못한 두 가지를 했는데, 바로 '경쟁력을 상실한 사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신사업을 육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히타치는 디지털 솔루션 사업을 주 전략 사업으로 선택하고 텔레비전, 화력발전 등 경쟁력을 잃었다고 판단되는 부문은 과감히 정리했다. 일본은 물론, 아시아의 스마트 공장 등에 솔루션을 제공하면서 착실히 시장을 넓히고 있다.
한국이나 중국 기업에 시장을 잠식당한 뼈아픈 경험을 한 일본 기업들은 기술 격차의 축소로 가격 경쟁에 돌입하게 되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자가 나는 제품은 물론, 흑자가 나는 제품이라도 범용화 단계에 진입할 위험이 있으면 빠르게 포기하고 거기에서 번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육성하는 '흑자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소니가 프리미엄 라인 외에 TV 사업, 컴퓨터, 리튬이온전지를 포기한 이유다. 그 대신 메타버스·자율주행차·인공위성 등에서 신사업을 개척하고 있다. 자동차 다음의 먹거리를 모색하고 있는 도요타는 후지산 근처에 스마트 시티를 짓고 있다. 그리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추진하는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유인 달탐사선을 제작 중이다.
식료품 기업인 아지노모토의 변신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식료품 관련 화학기술을 응용하여 반도체 절연재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장 점유율이 95%나 된다. 지금은 신사업 비중이 30%인데 향후 50%까지 늘릴 계획이다.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기업으로 알고 있는 아지노모토에서 사실은 기업 간 거래(B2B) 사업 비중이 상당히 높은 것도 일본 기업의 변화 중 하나다. 국내 시장이 정체되고 우수 인력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일본 기업은 전 세계 공급망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찾는 방향으로 진화해갔다. 반도체 소재·부품 시장 점유율 48%, 장비 시장 점유율 31%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 기업의 세 번째 전략은 규모가 아니라 이익률에 집중하는 것이다. 소니의 TV 부문은 2004년부터 적자를 보기 시작했다. 삼성이나 LG에 밀리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소니는 시장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판매 대수를 늘리는 데 집중했다. 결국 가격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고 적자가 지속됐다. 2012년, 매출 규모가 아니라 이익률에 집중하는 구조조정을 한 후 2014년이 되어서야 흑자로 전환했다. 소니와 유사한 경험을 한 일본 기업들은 매출 규모가 아니라 이익률이 시장 경쟁력을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구조조정의 주요 판단 근거가 이익률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5% 미만이던 소니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최근 수년간 1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자본금 10억엔 이상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률 평균도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주식 시장 역시 이익률에 주목한다. 세븐앤드드아이홀딩스는 편의점으로 유명한 세븐일레븐을 가지고 있는 지주 회사다. 2022년 결산에서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아지노모토도 사상 최대 매출을 보고했다. 그러나 주가 움직임은 판이하게 다르다. 세븐앤드아이가 상장된 2005년 9월 1일을 기준으로, 닛케이 평균은 최근까지 3배 가까이 올랐고 아지노모토 주가는 5배 이상 올랐다. 그런데 세븐앤드아이 주가는 2배가 채 되지 않는다. 반도체 절연재 시장에 진출하면서 영업이익률이 10% 이상으로 뛴 아지노모토와 달리 세븐앤드아이의 영업이익률은 4%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낮은 이익률은 기업의 미래에 의구심을 던진다.
네 번째 전략은 기술개발이다. 일본 기업은 저성장 국면에서도 기술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럽집행위원회는 매년 연구개발(R&D)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2500개 기업을 발표한다. 2022년 통계에는 일본 기업 229개사, 독일 기업 113개사, 한국 기업 47개사가 포함되었다. 그 기업들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를 계산하면 독일 5.1%, 일본 3.8%, 한국 3.4%다. 그런데 각 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 독일의 폭스바겐, 일본의 도요타, 한국의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독일과 일본은 4.8%와 3.9%로 별 차이가 없는데 한국은 2.1%로 뚝 떨어진다.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라고 하지만 그건 정부와 삼성의 연구개발비 덕분이다. 정부와 삼성을 통계에서 제외하면 한국은 결코 연구개발에 열심인 나라가 아니다. 같은 산업에 속해 있는 한국과 일본의 기업을 비교하면 대개 일본 기업의 연구개발비 투자 비율이 더 높다.
연구개발을 중시하는 일본 기업의 풍토는 회사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많은 기업이 어떤 연구개발을 하고 있는지를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서는 보기 드문 관례다. 한국에서는 이동통신 사업자들이 28㎓ 주파수 대역 서비스를 포기했는데, 일본에서는 NTT가 관련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를 팔고 있는 도요타이지만 전기차 시장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인데, 업계에서는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 가장 근접한 기업을 도요타로 보고 있다.
미국 NASA의 일본 버전인 JAXA는 우주 개발에 많은 공을 들였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 1월에 SLIM이라는 무인탐사기가 달 표면 착륙에 성공해 뉴스 1면을 장식했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JAXA가 개발한 탐사기가 인류 최초로 소행성에서 샘플을 채취했다. JAXA가 개발한 로켓인 H2는 이제 민간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으로 사업이 이관되었는데, 지금까지 47기가 발사에 성공했다. 소니는 인공위성 사업에 뛰어들었다.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사업들이다.
저성장기 일본 기업의 다섯 번째 전략은 기업 간 합종연횡이다. 1990년대 중후반 일본의 20대 초반 인구는 1000만명 정도였다. 지금은 600만명에 불과하다. 대학을 졸업하는 연령대의 인구가 40%나 사라진 것이다. 인재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한편 전성기의 일본 기업들은 소재에서부터 완성품까지 모든 공정을 일본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반도체 소재·부품, 반도체, 그 반도체를 쓰는 가전까지 모두 일본에서 생산하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가전이 무너지자 자국 반도체 수요가 내려앉았고 반도체도 치명상을 입었다. 일본의 기술만으로는 세계 시장을 제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부족한 인재와 기술을 기업 외부에서 조달하기 위해 기업 간 합종연횡에 열심이다.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을 구마모토현에 유치한 것이 그 예다. 일본 정부가 거액을 보조했지만 실은 일본 기업인 소니와 덴소가 TSMC와 공동으로 투자해 만든 합작회사다. 일본 8개 기업 출자로 홋카이도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 라피더스는 미국 IBM과 벨기에 IMEC의 기술 협력을 받고 있다. 최근 일본 NTT는 광전융합 기술의 실용화를 위해 인텔·SK하이닉스와 기술협력을 조율 중이라고 발표했다. 게임기 사업에서 앙숙인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 서비스에 중요한 클라우드 사업에서는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니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영상센서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주도하는 인공지능(AI) 기술의 연동도 추진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공동으로 미국에 전지 공장을 건립하기로 한 혼다는 소니와 함께 소니·혼다 모빌리티(Sony Honda Mobility)를 세우고 2025년부터 미국에서 소니 자동차를 주문 생산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기업 거버넌스 개선을 빼놓을 수 없다. 2016년 4월 스즈키 도시후미 세븐앤드아이 회장이 돌연 사임을 선언했다. 자회사 세븐일레븐의 이사카 류이치 사장 해임안을 이사회에 상정했는데, 그 해임안이 부결되자 사임을 결심한 것이다. 세븐앤드아이를 지금의 대기업으로 키운 사람이 스즈키 회장이었고 그가 주재하는 회의는 어전회의로 불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리한 인사에 반발해 반란표가 나왔고 제왕의 뜻이 꺾였다. 반란표 절반은 사외이사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혹은 기업 자체의 판단으로 사외이사의 독립성이 강화되던 때였다.
일본 기업이 내리막을 걷던 1990년대를 경험한 직장인들은 1970~1980년대에 성공한 최고경영자의 오만과 독선이 일본 기업의 진화를 막았다고 회고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그들은 버블기의 성공 신화에 매몰되어 이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위기에 빠뜨린 소니와 히타치를 구한 후대의 경영자들은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소통'을 중시했다. 히타치의 구조조정을 성공시킨 가와무라 다카시 회장은 이미 2012년에 사외이사가 이사회 과반수를 차지하도록 했다. 현재 히타치 이사회 임원 12명 중 9명이 사외이사이고 그중 5명이 외국인이다. 외국인 중 2명은 여성이다. 가와무라 회장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일본 기업이 살아나면서 일본 경제도 살아나고 있다. 일본 기업의 미래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생존을 위해 그들이 택한 전략은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국 기업에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학교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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