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질문에 “검색에 시간 걸려 모른다”는 피고, 진실화해위

고경태 기자 2024. 2. 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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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하미학살 각하처분 취소 청구소송 두 번째 재판
하미 학살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씨가 1월22일 한국에서 온 평화기행단에 하미 마을 위령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2000년 한국 참전군인단체 지원으로 세워진 이 위령비는 이듬해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한국군의 학살에 관한 내용을 연꽃 그림으로 대체한 바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각하 건수가 5천건이 넘어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답변하지 않는 거로 정리했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베트남 하미학살 사건 조사 각하처분의 정당성을 다투는 행정소송 재판에서 “과거 이러한 선례가 있냐”는 재판부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진실화해위 소송수행자들은 이날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답변으로 재판부의 질책을 받았다. 각하처분의 근거가 없음을 자인한 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6일 오후 서울행정법원 지하 2층 B204호 법정에서는 응우옌티탄(67)등 베트남 하미 학살사건 피해자 5명이 진실화해위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의 쟁점은 진실화해위 기본법에 외국인이나 외국 관련 제한(예외) 규정이 전혀 없음에도,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에 발생한 사건’을 배제하는 것이 적법한지 아닌지였다. 원고 쪽 대리인단은 재판 전 준비서면을 통해 이러한 해석에 대한 선례를 확인해주기를 재판부에 요청했고, 재판부는 진실화해위 소송수행자들에게 이에 관해 질문한 것이었다. 답은 간단했다. ‘검색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답변하지 않겠다.’

지난해 5월24일 열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제55차 전체위원회에서 베트남 하미 학살 사건 조사 건 각하를 표결하는 모습. 김광동 위원장(가운데)과 여당 추천 위원들이 각하 찬성의 뜻으로 손을 들고 있다. 김 위원장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옥남 상임위원, 차기환·장영수 비상임위원. 진실화해위 전체위원회 방청 화면 캡처

재판을 담당한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재판장 이정희)는 이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 결정할 때 선례를 검색해 참고하지 않는가. 우리도 판례 수십만 건을 검색한다”며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정희 재판장은 또 “제출하지 않으면 그런 선례가 없는 거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게 피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 쪽은 그제야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답변했다.

진실화해위 소송 수행자들의 태도를 두고 ‘궁색한 답변 자체가 곧 재판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외국, 외국인 사건을 각하한 선례가 없음을 인정하면 재판에 불리할 테니 검색이 안 된다는 핑계로 피해 가려 한다는 것이다.

하미 학살은 베트남전쟁기인 1968년 2월24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마을에서 한국군 해병대가 135명의 주민을 총격해 살해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5월24일 제55차 전체위원회에서 하미 학살 사건 조사 건을 논의했으나 여당 추천 위원들의 반대로 표결까지 간 끝에 4대3으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당시 김광동 위원장을 비롯한 여당 추천 위원들은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까지 진실화해위가 조사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조사대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하미 사건 베트남 신청인 5명은 한국의 변호사들을 통해 “각하처분이 위법하므로 이를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지난해 7월에 냈다.

원고 쪽 대리인단은 재판부에 제출한 준비서면을 통해 “외국인이 신청하거나 외국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진실규명 신청을 각하 처분한 경우는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에 대해 피고가 인정한다면 이는 원·피고 간 다툼없는 ‘사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원고 쪽은 진실화해위 쪽이 각하처분 사유로 밝힌 ‘조사의 어려움’도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조사의 어려움’은 진실화해위 기본법 어디에도 각하사유로 기재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 기본법 제21조 1항은 “진실규명 신청이 위원회 진실규명 조사대상에 해당하지 아니한 경우”, “진실규명 신청 내용이 그 자체로서 명백히 허위이거나 이유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등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각하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쪽은 준비서면을 통해 “원고가 평등원칙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제시한 선례들은 모두 신청인이 대한민국 국민이거나 사실상 대한국민 국민으로 볼 수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사건으로서 이 사건과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진실화해위는 외국인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하고 진실규명을 한 사건들 사례에 대해서는 “해당 사건 신청인들의 국적은 외국인이지만 민족 또는 원래 국적이 대한민국이기에 본 사안과는 다르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1기 진실화해위는 2010년 6월 ‘좌익재소자의 사망 관련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과정에서 간첩죄로 징역 20년형을 판결받은 일본 국적 하야청(1976년, 52살로 사망)에 대해 각하하지 않고 조사를 한 바 있다. 다음 재판기일은 4월16일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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