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명과 용병의 ‘굴욕’…’2023~24 KB바둑리그’ 초반 흥행도 시들
상위권팀 김진휘-한승주, 깜짝 선전
야심 차게 수혈한 용병 ‘물음표’
바둑TV KB리그 시청률은 하락세
“도저히 질 수 없는 바둑인데, 역전을 당했습니다.”
실전 상황을 직접 지켜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 일류 프로바둑 승부에서 중반 대국 도중이지만 인공지능(AI) 승률 그래프가 99.5% 이상까지 기울어졌던 판세를 뒤집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던 전례에 비춰보면서다. 바둑TV에서 ‘2023~24 KB국민은행 바둑리그’ 5라운드 3경기 해설자로 나선 유창혁(58) 9단이 지난달 27일 마한의 심장 영암팀 1지명 주장인 안성준(33) 9단과 중국 랭킹 1위(올 1월 기준)로 원익팀에 소속된 특급 용병 구쯔하오(26) 9단의 대국을 복기하면서 전한 관전평이다. 이날 대국 초반은 우변에서 우상귀로 이어진 전투를 그르친 구쯔하오 9단에겐 폭망각으로 흘렀다. “이 바둑을 (구쯔하오 9단이라도) 이기기 위해선 거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힘들 것 같다”는 유 9단의 해설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둥근 바둑돌의 승부 예측은 무의미했다. 승리를 확신한 안 9단이 초반 전투 이후, 시종일관 느슨한 수순으로 일관하면서 상대에게 빈틈을 내줬고 실수도 연발했다. 결국, 종반에선 중앙 대마 연결이 수읽기 실수로 끊기면서 안 9단의 승리 또한 234수 만에 날아갔다. 안 9단은 이후 이달 4일, 한 수 아래로 평가됐던 한상조(25) 6단과 가진 KB리그 6라운드 맞대결에서조차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승리를 헌납했다. 이로써 안 9단의 KB리그 연속 패배 기록은 지난 2017 KB리그 당시 흑역사로 세워졌던 강동윤(35) 9단의 7연패와 불명예스럽게 동률 1위에 올랐다.
반환점을 코앞에 둔 2023~24 KB리그 정규 시즌(총 14라운드)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기대했던 1지명 주장들의 연패 행진이 길어진 반면 예상치 못한 선수들의 깜짝 선전도 눈에 띈다. 여기에 올해 바둑리그 사상 처음으로 영입한 해외 용병 선수들의 부진한 성적표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직까지 절반 이상의 여정이 남겨진 KB리그 흥행몰이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이름값’ 못하는 1지명 주장들…끝 모를 연패 행진
이번 KB리그 초반엔 ‘이름값’ 못하는 각 팀의 1지명 선수들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당장, KB리그에 첫 출전한 영암팀에 주장인 안 9단의 부진은 뼈아프다. 지난 2012년 ‘한국물가정보배’ 타이틀 획득에 이어 지난해 개최됐던 ‘제16회 문경새재배 전국바둑대회’에서도 우승한 안 9단은 ‘제39기 KBS바둑왕전’(2020년) 준우승과 더불어 각종 국내외 대회 본선에 꾸준하게 진출해온 실력파 기사다. 최근 세계 메이저 기전으로 막을 내린 ‘제28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본선에서도 8강까지 진출한 바 있다. 그랬던 안 9단에게 이번 KB리그 7전 전패는 충격적이다. 이번 KB리그 6라운드에선 완봉패(4패)까지 당하면서 현재 꼴찌(8위)에 자리한 영암팀에게 안 9단이 아킬레스건으로 전락한 모양새다. 한때 4위(2016년12월)까지 치솟았던 안 9단의 국내 랭킹은 올해 2월 기준, 14위로 떨어졌다.
바둑메카 의정부팀 주장인 김명훈(27) 9단의 추락 역시 의외다. 김 9단이 6라운드까지 진행된 KB리그 전 경기에 출전해 거둔 성적만 1승 6패다. 지난 2017년 ‘제2회 미래의 별 신예 최강전’을 우승한 이후, 지금까지 보여줬던 김 9단의 족적에 비하면 이해불가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에 출전, 금메달을 획득한 김 9단은 지난해 12월 중국바둑갑조리그에선 당시 자국 랭킹 2위였던 딩하오(24) 9단까지 격파했던 강자다. 딩하오 9단은 지난해에만 세계 메이저 기전인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와 ‘LG배 기왕전’ 타이틀을 동시에 수집한 초일류 기사다. 이미 검증된 김 9단의 이번 KB리그 부진에 안타까움이 더해진 배경이다. 김 9단의 부진 속에 현재 의정부팀도 최하위권(7위)으로 분류됐다.
이에 반해 한국물가정보팀의 2지명으로 선발된 한승주(28) 9단과 원익팀의 4지명으로 지명된 김진휘(28) 6단의 이번 KB리그 초반 활약상은 기대 이상이다. 한 9단과 김 6단 모두 반상에서 위축되기 십상인 강자와 맞대결에서도 재기 발랄한 수들을 구사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기사들이다. 지금까지 맞대결을 펼친 선수들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팀의 중위권 유지에 지렛대 역할을 자임 중인 한 9단의 경우, 이번 KB리그에서 한우진(19) 9단, 안성준(33) 9단, 홍성지(37) 9단, 문민종(21) 7단, 김승재(32) 9단 등을 차례로 꺾으면서 5승 1패로 다승 부문 공동 3위에 랭크됐다.
현재 부동의 1위인 원익팀 소속의 김 6단 행마도 예사롭지 않다. 이번 KB리그에서 현재까지 4승 1패로, 공동 6위에 오른 김 6단은 백현우(23) 5단과 허영호(38) 9단, 이창석(28) 9단, 원성진(39) 9단 등에게 잇따라 승점을 챙겼다. 김 6단은 특히, 지난 3일 벌어졌던 6라운드에선 팀내 주장이자 1지명인 박정환(31) 9단이 중국바둑갑조리그 경기 일정상 빠진 가운데 수려한 합천팀의 주장인 원 9단에게 승리하면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첫 출전한 KB리그 용병 활약 ‘글쎄’…하락세인 바둑TV KB리그 시청률도 ‘고민’
이번 KB리그에서 가장 달라진 환경은 역시 ‘용병시대’ 개막이다. 이미 해외 용병이 영입된 축구나 야구, 배구, 농구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외국인 선수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이번 KB리그 합류가 결정된 용병들의 면면도 상당하다. 우선 지난해 6월, 신생 세계 메이저 기전으로 열렸던 ‘제1회 취저우 란커배 세계바둑오픈전’에서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24) 9단에게 1국을 내주고도 2, 3국을 잇따라 가져가면서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 구쯔하오 9단이 원익팀에 소속됐다. 또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바둑 개인전에서 박정환 9단과 신진서 9단에 이어 커제(27) 9단까지 잇따라 따돌리고 금메달을 거머쥔 쉬하오홍(23) 9단은 마한의 심장 영암팀에, 지난 2017년 열렸던 LG배 기왕전에서 우승 트로피를 차지한 당이페이(29) 9단은 한국물가정보팀에, 2011년 세계 청소년 바둑대회 소년부에서 우승한 랴오위안허(24) 9단은 울산 고려아연팀 등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과 달리, 현지까지 KB리그에서 용병들의 활약상은 아쉬운 게 사실이다. 랴오위안허 9단만 2승으로 무난한 신고식을 치렀다. 이외에 구쯔하오 9단은 1승을 가져갔지만 상대였던 안성준 9단의 자멸에 편승한 결과에 가까웠고 앙카이원(1승2패) 9단과 당이페이(1패) 9단, 쉬하오홍(1패) 9단 등의 존재감은 아직까진 미미하다. 바둑계 내부에선 중국 용병의 경우, 현행 제도상 국내 입국을 위해선 1주일마다 갱신해야 하는 번거로운 비자 문제와 자국 내 경기 일정 등이 겹치면서 KB리그 출전에 대한 어려움도 호소하고 있지만 바둑팬들의 눈높이에 못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징후는 수치에서도 확인된다. 올해 1월 첫 주에서부터 2월 첫 주까지 바둑TV의 KB리그 시청률은 0.11%로 전년 동기(0.13%) 대비 19%가량 감소했다. 2023~24 KB리그가 용병제까지 도입하면서 반등을 꾀했지만 결과적으로 팬들의 관심에선 갈수록 멀어지고 있단 얘기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자성의 목소리와 더불어 KB리그 팀 운영의 변화도 필요하단 의견도 내놓고 있다. 홍민표(40) 바둑국가대표팀 감독은 “기본적으로 주요 선수들의 경기력에서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며 “어이없는 실수로 판을 그르치는 경기들이 나오게 되면 팬들에게선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홍 감독은 이어 “현재 매 라운드 대국료 지급 방식으로 운영되다 보니, 승패에만 치중하면서 재미있는 맞대결 오더 등을 짜는 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며 “출구 전략 차원에서 보다 안정적인 연봉제 도입 등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한편, KB리그는 국내 바둑계의 인큐베이터다. 지난 2003년 6개 팀으로 출범한 한국드림리그에 이어 이듬해 한국바둑리그를 거쳐 2006년부터 매년 7~12개 팀이 참가, 평균 5~6개월 동안 운영되면서 국내 바둑계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허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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