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의 우회도로]로봇의 쓸모

백승찬 기자 2024. 2. 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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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3’에 출품된 권병준의 ‘오체투지 사다리봇’(2022). 백승찬 기자

인간은 목적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로봇은 그렇지 않다. 어떤 로봇은 하루 종일 손님을 위해 에스프레소를 만든다. 어떤 로봇은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고, 어떤 로봇은 거실 먼지를 빨아들인 뒤 충전기를 찾아 들어간다. 로봇은 인간을 위한 쓰임새가 있어야 하는, 실용적인 존재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희곡 <R.U.R>(1920)에서 처음 ‘로봇’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 로봇은 감정과 고통이 없이 대량 생산돼 산업 현장에서 노동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3’에 꾸며진 권병준의 전시실에는 이상한 로봇들이 가득하다.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외나무다리 위 로봇은 인간의 키보다 큰 상체로만 구성돼 있다. 조명이 향하면 로봇은 긴박한 국악 장단에 맞춰 팔을 흔들며 휘적휘적 춤을 춘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쇠파이프 위 몸통도 흔들려 금세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인간 관객의 염려는 아랑곳 않고 로봇은 춤을 춘다. 보는 사람 없어도 로봇은 춤을 출 것이다.

반대편에는 검은 망사 치마를 걸친 로봇이 있다. 얼굴 부위에는 손전등이 달려 고개를 들면 관객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것 같다. 로봇의 앙상한 팔 끝에는 살만 남은 부채가 달려 있다. 로봇은 팔을 흔들어 부채춤을 추지만, 인간 무희의 유려한 춤과는 거리가 먼 뻣뻣한 동작이 이어진다.

사다리는 수직 움직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일진대, 사다리 두 개를 잇대 만들어진 로봇은 정해진 궤도를 수평으로 움직인다. 인간이 타고 오를 수도, 로봇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 이동할 수도 없다. 손전등으로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며 두 개의 사다리 다리를 벌렸다 오므리며 이동하는 로봇은 종일 오체투지를 한다.

평범한 인간 관객의 눈에 이 로봇들의 기능은 모호하다. 춤을 춤으로써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보기엔, 그 동작이 어색해서 큰 감탄을 선사하지 않는다. 사다리를 벌려가며 같은 궤도를 오가는 로봇은 말할 것도 없다. 전시장 안 로봇들에 사용됐다는 100여개의 모터들은 인간에게 별다른 유용함을 안겨주지 못한 채 조금씩 닳아갈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23’에 출품된 권병준의 ‘부채춤을 추는 나엘’(2021). 백승찬 기자

권병준은 왜 이리 무용(無用)한 로봇을 만들었나. 그는 인간, 회사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로봇을 만들고 싶었다고 미술관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시장에 두 차례 방문했을 때, 그는 전시장 구석의 노트북 뒤에 앉아 있었다. 로봇들의 무용한 퍼포먼스를 지켜보고, 로봇의 동작을 수정하고, 즉석에서 수리했다. 그는 로봇들이 고장 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고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이 로봇들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SF 속의 미친 과학자는 종종 자신의 피조물을 완벽히 통제하려다 실패해 파국을 맞곤 한다. 권병준에겐 로봇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 로봇이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이 로봇들이 완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가 되도록, 그 이상한 존재가 평범한 관객에게 손을 내밀도록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1990년대 대중음악 팬들은 권병준을 ‘고구마’라는 예명으로 기억한다. 펑크밴드 삐삐롱스타킹의 보컬로 생방송 중 카메라에 손가락욕을 했다가 출연정지를 당했고, 이후 밴드 원더버드의 일원으로 근사한 로큰롤을 들려줬다. 네덜란드로 건너간 그는 전자악기 연구개발기관에서 일하다 귀국해 요즘은 음악, 연극, 미술을 아우르는 퍼포머로 살아간다.

이 전시실에서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다를 것이다. 큐레이터의 설명대로 “관람객들은 경쟁자이자 협력자, 혹은 대체자로서 로봇은 이미 사회 속에서 이방인이 되어가는 인간 노동자들과 함께 실패한 연대의 공동체를 형성해 왔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혹은 이 로봇들은 용도가 불분명한 데다 흉측하게 생긴 기계들이며, 그래서 완전한 자원 낭비라고 느낄 수도 있다.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었다. 나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몸의 일부처럼 사용해 로봇이라도 된 듯 바삐 살고 있는데, 어두컴컴한 전시장 안 로봇은 어색하고 느리지만 가장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며 의식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로봇이 오체투지·면벽수행을 하며 우리 대신 세상을 정화하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일까. 완전히 무용해 보이는 그 동작들이 결국 작지만 중요한 의미를 창출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이 로봇들도 언젠가는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정도로 고장 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권병준은 마지막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로봇이 움직이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의 자연(스스로 그러한 것)이 되겠지요.”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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