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자생식물 이야기〈23〉섬노루귀(Hepatica maxima Nakai)
진화에도 방향성이 있다. 왜성화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형화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울릉도의 경우, 진화가 대형화로 방향을 잡은 경향이 나타난다. 왕작살나무, 왕매발톱나무, 왕호장근, 큰두루미꽃, 큰연영초, 넓은잎쥐오줌풀, 섬나무딸기, 섬국수나무, 섬쥐똥나무, 섬자리공, 섬시호, 섬바디, 울릉산마늘이 그렇다.
내륙에 분포하는 노루귀가 소형에 낙엽성인데 비해, 울릉도라는 섬에서 지리적 격리를 통해 진화한 섬노루귀는 상록성에다 잎이 노루귀 잎 면적의 10배 이상 크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진화가 진행되며, 중간 형태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면서 변이폭이 좁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울릉도 특산 섬노루귀는 진화의 입장에서 볼 때, 가히 혁명적인 변이폭을 나타내는 점이 특이하다. 울릉도의 따뜻하고 습윤한 기후, 부식질이 풍부한 토양을 고려할 때, 섬노루귀의 대형화가 이해가 되는데, 동일한 조건의 제주도에서는 보다 크기가 작은 새끼노루귀로 진화한 이유가 궁금하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 한 쪽으로 방향성을 잡게 되면, 그 방향성을 따라 진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노루귀속은 전세계적으로 7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속이다. 국내에는 노루귀, 새끼노루귀, 섬노루귀 3종이 분포한다, 노루귀는 중국, 러시아에 분포하며, 국내에선 제주도와 울릉도를 제외한 전역에 분포한다.
산지나 들판의 경사진 양지에서 주로 자라는데 키큰나무들의 잎이 무성해지기 전 2~4월경에 꽃을 피운다. 노루귀, 복수초, 너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변산바람꽃 등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키작은 꽃들은 숲이 우거지면 햇빛을 보기 어려워지고 높이 자란 풀들에 가려 눈에 띄지않게 되므로, 경쟁을 피해 서둘러 꽃을 피우고, 수정을 하고, 열매를 맺고, 여름이 오기 전에 생장을 마무리한다.
노루귀 꽃받침은 6~8장이며, 백색, 분홍색, 보라색 또는 남색을 띄면서 나비나 벌과 같은 곤충을 불러들이는 꽃잎 역할을 대신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람꽃 종류도 노루귀와 같은 수정전략을 쓴다. 새끼노루귀와 섬노루귀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노루귀에 비해 새끼노루귀는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 짙은 녹색 잎 표면에 흰색 무늬가 발달한다. 전라남도와 제주도에 분포한다.
섬노루귀(Hepatica maxima)는 전세계 노루귀속 중에서 가장 대형이며, 울릉도 특산식물이다. 잎은 모두 뿌리에서 돋아 사방으로 퍼지고 잎자루가 길다. 잎은 길이 8㎝, 폭 15㎝ 정도로 표면은 짙은 녹색에 광택이 난다,. 꽃은 2~4월에 피며 지름 1.5㎝ 정도로 흰색 또는 연분홍색으로 핀다, 새 잎이 나오기 전에 긴 화경이 나오고 그 끝에 1송이씩 달린다.
꽃받침은 6~8장이며 긴 타원형으로서 꽃잎처럼 보인다. 꽃잎은 없고, 여러 개의 수술과 암술이 있다. 열매는 수과(瘦果 : 열매가 익어도 껍질이 갈라지지 않는 형태)로서 방추형(紡錘形 : 무의 뿌리 같이 생긴 것으로 가운데가 넓고 양끝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모양)이며, 노루귀와 새끼노루귀와 달리 열매에 털이 없다. 6~7월에 성숙한다. 근경은 비스듬히 뻗고, 각 마디에서 흑색의 잔뿌리가 사방으로 내린다.
재배특성 및 번식방법
숲속 낙엽수림 아래, 부식질이 풍부하고 배수가 양호한 토양에서 잘 자란다. 낙엽수에 잎이 돋기 전 이른 봄에 햇빛을 받으면서 개화하고, 늦봄부터 여름까지는 낙엽수림 하부에서 반그늘 조건에서 잎이 생장하면서 광합성을 한다. 숲 속에서 자라는 상록성으로 내음성이 강하고, 추위에도 잘 견디는 편이다.
맹아력이 높아서, 포기나누기를 통한 무성증식이 용이하다. 포기나누기를 할 때, 무리하게 한 촉씩 나누지 말고 2~3촉씩 붙여서 나누면 좋다. 섬노루귀는 자가수분이 잘 되고, 열매가 잘 달린다. 종자를 통한 유성 대량증식도 용이하다. 6~7월경 성숙한 열매를 채취하여 직파하면 이듬해 봄에 발아하며, 발아율이 높다. 오래 보관한 종자를 파종할 경우, 물에 1~2일 침지 후 노천매장했다가 이듬해 봄에 꺼내서 파종하면 발아가 잘 된다.
원예·조경용
사철 푸르고 광택이 나는 잎, 꽃이 귀한 이른 봄에 피는 꽃, 다발로 달리는 귀여운 열매, 내음성이 강해서 실내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 등이 섬노루귀의 매력이다. 남부지방에선 정원, 공원, 화단 조성용 소재로 안성맞춤이다. 중부 이북 지방에선 잎과 열매를 감상하는 실내 관엽?반려 식물로 활용하면 좋다. 분화로서 개발가치가 높아서 이미 화훼공판장(양재동) 등지에서 판매가 되고 있다.
식·약용
봄에 새로 나오는 잎을 데쳐서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한다. 노루귀 꽃을 말려뒀다가 차로 마시기도 한다. 은은한 향에 약간 단맛이 난다. 끓인 물을 잠시 식혀서 70℃ 정도의 물에 노루귀 꽃을 띄워서 우려낸 다음 마신다.
노루귀의 중국명은 장이세신(獐耳細辛)이다, 세신(족도리풀의 약명)과 비슷한 특성을 갖는 노루귀(獐耳)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린다. 노루귀는 뿌리가 달린 전초를 말려서 약재로 사용하는데 진통, 소염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고산습원에도 섬노루귀가 식재되어 잘 보존관리되고 있다. 꽃이 귀한 이른 봄에 수줍게 꽃을 내미는 노루귀를 관람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2019년에 노루귀와 함께 섬노루귀를 대량으로 식재하여 군락을 조성했다.
고맙게도 자리를 잘 잡아줘서 해 마다 이른 봄에 알고 찾아오는 관람객에게 꽃으로 보답해 준다. 감사한 일이다. 세월은 흘렀고, 그 사이 드문드문 빈 자리가 보인다. 부지런히 준비해서 내년쯤엔 빈 자리를 채워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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