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한테도 부끄럽지 않았다"…'무명 8년→MVP 거포' 인생역전, 또 다른 드라마 기다린다
[스포티비뉴스=시드니(호주), 김민경 기자]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야구장에 나왔을 대는 누구한테도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
두산 베어스 거포 김재환(36)의 야구 인생은 굴곡이 꽤 많았다. 인천고를 졸업하고 2008년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 4순위로 입단해 거포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입단할 때 포지션은 포수. 구단은 양의지(37)와 같은 공격형 포수의 탄생을 기대했는데, 포수를 지속하기에는 어깨에 문제가 있어 1루수를 거쳐 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믿을 건 방망이었는데, '거포'에 걸맞은 폭발력을 보여주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
김재환은 무명 선수로 8년을 버틴 끝에 2016년 두산을 대표하는 좌익수로 단번에 자리를 잡았다. 그해 홈런 37개, 124타점을 몰아치면서 새로운 국내 4번타자의 탄생을 알렸다. 2018년에는 139경기, 타율 0.334(527타수 176안타), 44홈런, 133타점, OPS 1.062라는 경기로운 성적을 남기면서 정규시즌 MVP까지 차지했다. 김재환은 두산 간판타자의 자리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고, 2022년 시즌을 앞두고는 두산과 4년 115억원에 FA 계약을 하면서 잠실 거포의 가치를 입증했다.
정상을 달리다 삐끗할 때도 있는 법이다. 김재환은 지난해 유독 크게 넘어지면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132경기, 타율 0.220(405타수 89안타), 10홈런, 46타점, OPS 0.674에 그쳤다. 너무도 김재환답지 않은 성적이었다. 과거에는 김재환을 피하던 상대 배터리가 이제는 김재환과 적극적으로 승부해 아웃카운트를 잡으려 드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릎 상태도 좋지 않아 수비하기도 불편해지면서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김재환은 그래서 지난 시즌을 마치자마자 누구보다 바쁘게 시간을 썼다. 마무리캠프에서는 이승엽 감독과 1대 1 특타를 3주 동안 진행했고, 마무리캠프를 마친 직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전직 메이저리거 강정호에게 타격 레슨을 한 달 정도 받았다. 그렇게 2개월을 타격 개조에 힘을 쏟았고, 배운 것들을 스스로 정립하는 시간을 거쳐 현재 호주 시드니에서 스프링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두산은 이번 시드니 캠프에 세대교체의 주축이 될 만한 젊은 야수들을 대거 데려왔다. 내야수 박준영 박지훈 오명진 이유찬 박계범, 외야수 김대한 홍성호 전다민, 포수 김기연 등이 그렇다. 이 감독은 이 선수들이 어느 포지션이든 자기 자리를 꿰찰 정도로 성장해 주길 바라고 있고, 선수들 역시 구단의 매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래도 베테랑들의 눈에는 후배들이 아직은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후배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재환은 더더욱 그렇다.
7일 호주 시드니 블랙타운 블랙타운야구장에서 만난 김재환은 "후배들을 볼 때 그냥 과거에 의욕만 앞섰던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의욕만 앞서다 보니까 마음가짐이나 멘탈 같은 게 조금 부족했다. 나는 진짜 느껴봤으니까. 캠프 때는 주전이라고 이야기를 들어서 준비하고 있으면 당장 시즌 개막할 때는 (엔트리에서) 사라져 있었으니까. 당연히 내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뚜껑을 열면 '나 어디 갔어요?' 했던 날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렇게 의욕만 앞선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안타까워도 선배가 대신 후배의 답을 찾아줄 수는 없다.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면 계속 그 자리에 머물다 사라지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김재환은 "언제 깨달을 수 있다고 말을 못하겠다. 대부분은 깨닫지 못하고 끝나니까. 지금 잘하는 선수들을 보면 나이가 어릴 때도 잘했던 선수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그 깨달음을 타고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후배들은 너무 착하다"며 조금 더 독하게 자기 밥그릇을 챙기길 바랐다.
김재환은 또 "나도 어릴 때 형들이 '정신 차려라'라고 말해 줘도 와닿지 않았다. 나는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자꾸 더 독하게 해야 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공 100개 칠 거 200개, 300개 이러는 게 독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하루에 펑고 1000개씩 받으면 '나 진짜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후배들을 보니까 '아 내가 그때는 이랬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김재환은 최근 '두산 색깔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 게 가장 아쉽다. 그라운드에서 두산의 독보적 팀 컬러였던 끈기 있는 야구, 허슬 플레이가 사라졌다는 것. 김재환은 허슬플레이를 이끌었던 선수 가운데 하나였기에 이런 평가를 들으면 그 누구보다도 기분이 나쁘다.
김재환은 "나는 사실 성적을 떠나서 이것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야구장에 나왔을 때는 누구한테도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 후배들도 조금 더 진심을 다해서 몰두했으면 좋겠다. 후배들뿐만 아니라 우리 팀 전체가 조금 더 이를 악물고 하는 그런 팀이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래도 후배들이 잘할 것이라 생각한다. (정)수빈이 같은 애들이 해줘야 하는데, 수빈이가 이제 정신을 차려서 정말 다행인 것 같다. 우리 수빈이가 달라졌다. 정신 차렸다. 본인도 느꼈을 것이고, 우리 후배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김재환은 올해 타격에 공을 들인 만큼 수비로도 부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난 시즌 김재환을 괴롭혔던 무릎도 잘 재활해 지금은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모든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김재환은 "사실 작년에 폼이 많이 무너졌던 게 무릎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영향이 컸던 게 맞았던 것 같다. 지금은 재활도 잘해서 좋아졌다. 또 개인적으로 수비를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나가는 것을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들이 수비를 나가면 더 열심히 한다. 잘하는 수비가 아니기 때문에. 또 두산이 수비에 자부심이 있는 팀이다 보니까 수비 나가 있을 때만큼은 진짜 최대한 집중하려 하고 있고, 수비하러 많이 나가고 싶다"고 했다.
김재환은 올해 다시 4번타자 좌익수로 매일 출전하는 일상을 꿈꾸고 있다. "올해는 정말 바빴으면 좋겠다"는 게 김재환의 간절한 소망이다. 대신 후배들과 정당하게 경쟁할 준비도 돼 있다. 후배들이 자신과 같이 또 다른 드라마를 쓰길 기다리되, 재미없는 드라마가 되지 않도록 김재환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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