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복잡하고 간접적인 명령형,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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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추운 겨울을 한국에서 보냈다.
일상에서 변화하는 한국어를 경험했는데 가장 눈에 띈 건 명령형이다.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화자가 상대방에게 일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명령형은 대체로 예민하고, 한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에서도 사용법이 복잡하다.
한국어는 원칙적으로 동작이 없는 형용사는 명령형으로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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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ㅣ 언어학자
오랜만에 추운 겨울을 한국에서 보냈다. 새 책 출간으로 여러 지역 독자들과 가까이에서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았다. 일상에서 변화하는 한국어를 경험했는데 가장 눈에 띈 건 명령형이다. 자주 들리던 ‘건강하세요’라는 말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화자가 상대방에게 일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명령형은 대체로 예민하고, 한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에서도 사용법이 복잡하다. 명령형을 쓸 때 크게 작동하는 요소로는 ‘인적 거리’, ‘직접성’, ‘명령의 강도’가 있다.
‘인적 거리’라고 하면 친밀감을 떠올리겠지만 다양한 관계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관습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부모 자녀 사이에는 존댓말이 당연했지만 20세기 말 이후 반말을 쓰는 이들이 늘었다.
‘직접성’이란 표현이 얼마나 직접적인가에 좌우된다. 언어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직접적 표현보다는 간접적 표현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어에는 직접적 표현이 많지만, 언어적으로 가까운 영어에서는 간접적 표현이 더 많다. 영어를 쓰는 독일인은 영어 원어민에 비해 직접적 표현을 더 많이 쓰곤 하는데, 그러다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명령의 강도’란 상대방을 향한 명령의 힘이 갖는 세기인데, 같은 표현도 상황에 따라 달리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위험한 상황에서 강력한 명령은 실례가 되지 않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면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명령의 강도를 세심하게 맞춰야 한다. 명령과 요청 사이 그 어디에선가 미묘한 상황은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럴 때 명령이냐, 요청이냐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한국어는 원칙적으로 동작이 없는 형용사는 명령형으로 쓸 수 없다. ‘건강하세요’나 ‘행복하세요’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런 표현은 2000년대 이후 보급, 유행한 ‘과잉 존댓말’의 여파라 할 수 있다. 일터와 가정에 인터넷망이 구축되고 그 속도 또한 빨라진 한국의 1990~2000년대에는 아파트 중심의 도시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이 시기에 오늘날의 한국식 생활이 형성되었다. 핵가족 중심의,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남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개인 점포 대신 체인점이 늘어나면서 매장에서 획일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마다 간접적 표현이 늘었고, ‘과잉 존댓말도 등장했다. 그 무렵 문법적으로 애매모호한 ‘좋은 하루 되세요’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유행은 시대를 반영한다. 돌아보면 1990년대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권위주의 문화가 퇴색하면서 ‘~시기 바랍니다’나 ‘~십시오’ 같은, 잔뜩 격식을 갖춘 표현이 점차 줄었고, 2010년대 이후로는 명령형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오늘날에는 직접적 명령이 아닌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둔, 간접적 명령형을 자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업무 관련 이메일에 자주 등장하는 ‘~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얼핏 듣기에는 부드러운 요청에 가깝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요청이라기보다 본인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려는 표현이자 해석에 따라서는 강한 의도가 담겨 있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왜 늘어난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소통이 늘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반응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에서 비롯했다. 전화통화 하거나 얼굴을 보고 말할 때는 밝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요’라고 명령형을 써도 실례가 되는 경우가 드물고 오히려 신뢰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문장만으로는 그 마음이 잘못 전달될 수도 있어 불안하다. 따라서 훨씬 더 복잡하고 간접적으로 표현할 때 더 안전하게 느낀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터넷과 도시화로 인한 변화의 물결은 다소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언어의 변화 양상 역시 이에 맞춰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다 바쁘고, 문장에 관해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다. 간결하고 격식을 갖춘 명령형이 필요하다.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십시오’의 부활을 그 대안으로 삼는 건 어떨까.
언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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