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 잡는 수사기관이 피해자 보호 업무까지... 결국 곳곳에 빈틈
가해자 집유 받았는데 모르는 피해자들
피해자 지원 안내, 권리보장 첫 단추지만
법적 의무는 피해자 조사때 안내가 달랑
편집자주
검찰청법은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로 규정합니다. 범죄자를 잡고 수사해 재판에 넘겨 유죄를 받아내는 일뿐 아니라, 범죄예방이나 형집행, 국가가 당사자인 소송 등 수사 외의 공적 업무도 맡고 있어 그런 칭호가 붙은 겁니다. 범죄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업무도 마찬가지로 검찰의 몫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검찰 역시나 범인 잡는 수사기관으로서의 역할에만 매진하는 바람에, 피해자 지원 업무를 만족스러울 정도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피해자와 현장 전문가들의 얘기를 바탕으로, 수사기관이 피해자 보호 업무를 해야 하는 현 시스템의 한계를 살펴봅니다.
어머니를 살인 사건으로 잃은 유족 A씨. 장례를 마친 그는 어머니 유품을 챙기기 위해 고향집을 찾았다가 우체통을 보고 오열하고 말았다. 어머니 집엔 수사기관이 보낸 '수사진행상황통지서'가 덩그러니 꽂혀 있었던 것이다. 봉투 겉면 수신자는 바로 사망한 어머니였다.
살인 피해자의 이름으로 '살인 사건 진행상황' 우편물을 발송하는 수사기관의 이 무신경하고 기계적인 일처리에서 보듯, 일부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피해자 감수성'은 여전히 낙제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경찰수사규칙에 따르면 경찰은 피해자에게 수사 진행상황을 통지해야 하고,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직계친족 등에게 통지해야 한다. 살인사건의 경우 피해자 본인이 아닌 유족에게 통지서를 전달해야 했지만, A씨 사건에서는 그만 습관적으로 피해 당사자에게 통지한 것이다.
이런 일은 비단 수사통지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범죄자를 잡아야 하는 업무 특성상 검찰과 경찰은 '수사' 외의 업무를 '가욋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잘 해봐야 법인 잡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으로 보이는 피해자 업무 역시나, 그런 이유 때문에 잔무 털듯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현장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피해자 조사 때 안내서 주고 끝
헌법 제30조는 범죄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구조 의무를 명시하고 있고, 그 근거법인 범죄피해자보호법은 법무부 등에 범죄피해자 보호·지원 계획의 수립 및 시행의 의무를 부과했다.
특히 검찰은 범죄피해자 보호·지원 시행기관으로 가장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범죄피해구조금과 경제적 지원 업무는 물론, 형사절차에 대한 정보제공, 피해자 국선변호사 선임, 피해자의 재판 진술 등 참여 지원까지 대부분 피해자 관련 업무가 검찰을 통해 이뤄진다. 대부분 피해자 지원은 피해자가 신청할 때만 절차가 시작되기에, 검찰에겐 이를 안내해야 할 책무도 있다. 아직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위기 상태에 놓인 피해자들인 만큼, 꼼꼼하고 지속적인 안내가 요구된다.
하지만 현실에선 자기 권리를 제대로 안내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다. 심지어 피해자가 가해자의 재판 진행 상황을 통지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남편을 범죄로 잃은 유수정(가명∙61)씨의 경우,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가 집행유예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사건 통지를 신청하라'고 안내해야 하는 게 수사기관의 법적 의무이니 어떤 방식으로든 안내가 됐겠지만, 한국일보가 만난 범죄피해자나 가족들은 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무부가 지난해 범죄피해자 지원을 받은 9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검찰의 '범죄피해자의 권리와 지원에 관한 정보 제공'에 대해 경찰(76.8점)보다 낮은 만족도 점수(74.1점)를 줬다. 54.3%가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거나 "지원서비스 내용에 대한 홍보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알수 없었다"거나 "범죄피해자센터가 있다는 것도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유는 뭘까. 검찰 차원에서의 피해자 권리 안내가 형식적·기계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다. 피해자에 대한 밀착 관리나 세부적인 안내는 같은 건물에 있는 범죄피해자센터에게 맡겨 둔 채, 정작 그 법적 의무가 있는 검찰은 '안내가 이뤄졌다'는 형식만 채우기 급급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대검찰청 예규인 '범죄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지침'은 "검사 또는 수사관은 피해자를 조사하는 경우 '범죄피해자 권리 및 지원제도 안내서' 1부를 피해자에게 교부해야 한다"고 정한다. 그런데 피해자 조사는 대부분 피해자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순간이다. 사건 당시의 상황을 다시금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낯선 법률 용어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이 단계에서 검찰이 제공하는 안내서는 피해자의 권리와 지원 제도가 빼곡하게 나열된 A4 용지 한 장이다. 사건 열람·등사권, 구조청구권 등 피해자 권리는 이 한 장의 안내서를 근거로 하여 당사자의 신청으로 이어질 때라야 보장 받을 수 있다.
"기소할 사건 우선 지원"
피해의 심각성보다 가해 행위의 유·무죄를 중심으로 피해자 지원 여부를 판단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결국 이것은 유죄를 받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검찰이 피해자 지원 업무를 맡으며 생기게 된 숙명으로 평가된다. 법무부는 사건의 유무죄와 구조금 등 지급의 관계를 묻는 본보의 질문에 "사건이 기소되기 전에도 경제적 지원이나 구조금을 받을 수 있다"며 "불기소처분이나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고 해도 무조건 지원금을 반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하지만 현장의 이야기는 달랐다. 검찰까지 송치될 사건이냐, 기소 처분이 나올 사건이냐에 따라서 검찰과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적극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한국의 범죄피해자 지원제도는 지나치게 검찰 중심"이라며 "피해 자체가 명확한 사건임에도, 검찰이 유죄 및 기소를 판단하기 전까지 피해자 지원이 미뤄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향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할 가능성이 높은 사건에서도 지원은 소극적이다. 인력도 없는 상황에서 우선 지원하고 향후 반환 절차를 진행하느니, 반환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아예 후순위로 밀어버리는 거다. 일선의 한 피해자 전담 경찰관은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느냐가 지원 결정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했다. 이어 "합의 가능성이 있는 경찰 단계의 사건은 아무리 피해자가 도움을 호소하고 긴급하게 병원비, 생계비 등을 지원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도 무리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며 "결국 범죄를 당하고 경제적 타격까지 입은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바라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받으면 재판에서 '엄벌'을 받아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피해자 전담 검사도 주업무는 수사
검찰은 범죄 발생 직후부터 가해자가 확정 판결을 받을 때까지 가장 오래 피해자가 상대하는 기관이다. 구조금 등 피해자 지원에 계속 누락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 검찰의 책임이다. 범죄피해자보호법상 검찰은 범죄피해자보호·지원 시행기관이고, 피해자에 대한 경제 지원은 검사가 위원장인 경제적지원심의위원회와 범죄피해구조심의회를 통해 결정된다. 범죄피해자센터는 관련 업무를 위탁받아 돕는 사단법인(비영리법인)일 뿐, 피해자 지원 및 안내에 관한 법적 의무는 여전히 검찰에게 있다.
전문가들은 수사기관이 피해자 지원 업무까지 맡으면서 갖게 된 태생적인 한계라고 지적했다. 검찰에서 피해자 지원 업무를 전담하는 인력은 지청당 1명이다. 피해자 지원 업무만 하는 '피해자 전담 경찰관'과 달리, '피해자 전담 검사'는 대개 강력범죄 송치사건을 맡는 형사부 검사 중 한 명이 맡는다. 그 역시나 주업무는 수사다. 지청 사정에 따라선 수사 업무에 더해 공판까지 챙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피해자 지원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범죄피해자 업무에 밝은 한 법조인은 "형사부 검사 한 명당 처리해야 하는 사건이 한 달에 수십 건"이라며 "수사와 공소유지가 주 업무이기 때문에, 피해자 지원은 부가 업무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피해자에 대한 지원은 피해자가 '이제 제발 그만하세요' 할때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검사는 너무 바쁘다.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피해자학회장)는 "법무부와 검찰이 선제적으로 피해자 지원 제도를 도입하고 발전시켜 온 것은 사실"이라며 "센터와 함께 전문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이 더 확충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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