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스탠스’ 가미해 통합진보당 제소 기획한 법원행정처···“정치적 중립 위반”

이혜리 기자 2024. 2. 7. 11:2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사법농단 사건을 심리한 1심 법원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심의관에게 통합진보당 지방의회 의원을 퇴출시키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소송 제기 방안을 검토시킨 게 명백히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1부(김현순·조승우·방윤섭)의 임 전 차장 판결을 살펴보면,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2015년 6월 심의관에게 ‘통진당 지역구 지방의회의원 상대 제소’ 문건 작성을 시킨 것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이 문건에는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 이후에도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던 지방의원들의 직을 상실시키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들로 하여금 행정소송을 제기하게 하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문건에는 “해당 자치단체는 적극적으로 행정소송을 제기해 그 지위를 상실한 지역구 지방의원의 의정활동을 중단시키고 각종 지원 등을 하지 않는 한편, 재창당 움직임을 사전에 억제할 필요 → 아래의 제소 방법이 적절함”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청구취지와 청구이유를 검토하고, 제소에 대비해 통진당 소속 지역구 지방의원 31명의 명단을 자치단체별로 정리한 뒤 단체장이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소속인 곳에만 별도의 색상 표시를 해놓았다.

재판부는 이 문건이 당시 여권(현 국민의힘)의 시각에서 작성됐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문건은 내용상 제소 필요성과 구체적인 제소 방법까지 검토했고, 소 제기 후보지역을 검토해 보수적 색채가 강하고 여당이 단체장이면서 진보 진영의 영향력이 적은 경남 지역 중 한 곳을 선택해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했다.

이어 “그 자체로 정치적 중립성 문제의 소지가 농후하다”며 “반드시 청와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시 여권 쪽의 전략적 스탠스를 가미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2015년 6월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작성한 ‘통진당 지역구 지방의원 상대 제소’ 문건 일부. 이 문건에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통진당 의원들이 퇴직하지 않을 경우 지방자치단체가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이 나와있다. 법원행정처 자료

재판부는 이 문건 작성이 사법행정상 필요하다거나 사법행정이 할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통진당 의원 퇴출 방안은 사법부 위상 강화나 사법권 독립 수호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가 향후 벌어질 소송에 대비해 상황을 예측하는 수준의 검토를 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구체적으로 소송 제기 방안까지 검토한 것은 단순히 대응전략 마련도 아니라고 했다.

재판부는 “소송의 제기가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어떠한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이런 검토는 특정 정당을 탄압하고 특정 정당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내용”이라고 했다.

이어 “국가공무원법 제65조,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27조, 법관윤리강령 제7조 등의 법령이 정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검토”라며 “헌법이 정한 삼권분립의 원칙에도 반할 여지가 크다”고 했다.

이 문건은 2018년 5월 대법원 특별조사단이 공개해 알려졌다. 이 문건 파일명에는 ‘BH(청와대)’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조사단은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적절한 시점에 청와대에 제시하기 위해 문건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검찰도 임 전 차장이 문건 작성 즈음 청와대에 출입했다며 이 문건이 청와대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문건이 작성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때다. 헌재에 통진당 해산을 청구한 게 박근혜 정부였고, 청구인 대표자는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다.

다만 재판부는 “문건이 청와대의 요청으로 작성돼 청와대에 건네진 문건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곽병훈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이 문건을 전혀 본 적이 없다고 진술한 점, 임 전 차장이 파일명의 ‘BH’는 자신이 썼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경위가 기억나지 않거나 모르겠다고 진술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