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인천 프랜차이즈 스타’ 전자랜드 이끌었던 포웰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1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외국 선수가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제도적인 이유를 포함한 여러 사안으로 인해, 오랜 시간 뛰지 못했기 때문.
그러나 리카르도 포웰은 달랐다. 인천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포웰의 소속 팀이었던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는 플레이오프에 꾸준히 진출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
KBL 진출 이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NCAA 사우스캐롤라이나 게임칵스에서 네 시즌을 보냈다. 대학 시절 132경기에서 누적 1,500점 64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71개의 3점슛을 성공한 그는 당시 자교 선수 기준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선 선수가 됐다. 득점력 대비 탁월한 리바운더로도 이름을 알렸다.
3학년이던 지난 2003~2004시즌에는 올-SEC팀에 선정되는 등 주가를 높였다. 비록 포웰의 모교는 NCAA 토너먼트에 나서지 못했으나, 포웰은 2005년 2부 격 토너먼트인 NIT(National Invitational Tournament)에서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최우수선수에도 뽑히면서, 이름을 알렸다.
대학을 마친 포웰은 포르투갈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벤피카에 몸담은 그는 평균 19.4점 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리그 평균 득점 4위에 올랐을 정도로 대단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포르투갈리그가 여타 유럽리그에 비해 뛰어난 경쟁력을 지닌 건 아니었지만, 포웰은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입지를 다진 포웰은 호주리그(NBL)의 뉴질랜드 브레이커스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호주리그 데뷔전부터 34점을 몰아치면서 실력을 발휘했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평균 28.3점을 기록했고, 평균 스틸도 10위 안에 들 정도로 발군의 감각을 자랑했다. 2006~2007올스타전에서는 슬램덩크 대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여세를 몰아 NBA 진출을 노렸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소속으로 2007 NBA 서머리그에 나섰다. 그러나 살아남지 못한 포웰은 우크라이나로 향했다. 이후 NBA D-리그(현 NBA G-리그) 드래프트에서 나섰고, 1라운드 2순위로 다코다 위저즈(현 샌터크루즈 워리어스)의 부름을 받았다. 다코다 소속이었던 포웰은 경기당 22점 6.6리바운드 4.7어시스트 1.4스틸을 기록했다.
2008~2009
D-리그 생활을 했던 포웰은 한국으로 고개를 돌렸다. 2008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1순위 후보로 손꼽혔고, 트라이아웃에서도 단연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안정된 득점력으로 여러 구단의 구미를 당겼다. 그리고 전체 1순위로 전자랜드의 부름을 받았다.
포웰의 활약은 첫 시즌부터 돋보였다. 팀의 주포로 나서면서, 국내 선수도 잘 살렸다. 포웰은 2008~2009시즌 평균 25.4점 6.6리바운드. 그러나 포웰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의 지원이 다소 아쉬웠다.
전자랜드는 시즌 중에 결단을 내렸다. KCC에 있었던 서장훈을 붙잡으며, 전력을 살찌웠다. 포웰은 서장훈의 합류로 스몰포워드로 나설 수 있었고, 전자랜드는 ‘서장훈-포웰-김성철’로 이어지는 막강한 공격 진영을 갖췄다.
서장훈이 가세한 이후, 전자랜드는 신바람을 일으켰다. 트레이드 직후에 손발을 정교하게 맞추는 시간이 필요했으나, 전자랜드는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였다. 가끔 기복을 보이긴 했으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전자랜드의 플레이오프 상대는 KCC. 트레이드 당사자 간의 대결이었기에,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전자랜드가 KCC를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시리즈 최종전까지 치른 끝에 석패했다.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2012~2015
KBL 데뷔 시즌을 마친 후, 포웰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NBA 진출을 타진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또 한 번 D-리그 드래프트에서 나섰고, 전체 1순위로 앨버커키 썬더버드(현 클리블랜드 차지)에 합류했다. 시즌 종료 후 중국 2부 리그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 이란과 이스라엘을 거쳤고, 2012년 여름에 한국으로 재입성했다.
포웰은 2012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8순위로 전자랜드 유니폼을 입었다. 4년 만에 돌아온 포웰은 인천 팬들의 많은 환영을 받았다. 문태종과 함께 원투펀치를 구축했다. 2012~2013시즌 평균 18.4점 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재계약을 체결한 포웰은 2013~2014시즌에도 변함없이 활약했다. 1옵션 외국 선수로 꼽힌 찰스 로드가 예전 같지 않았기에, 포웰의 출전 시간이 늘어난 것.
그리고 포웰은 인천에서 한 시즌 더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2014~2015시즌은 쉽지 않았다. 시즌 초반에는 당시 최다인 9연패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부산 KT를 상대로 25점 차 대승을 거뒀다. 연패의 사슬을 어렵게 끊었다. 이후 6연승을 내달리기도 하는 등 반전했다.
그 중심에 포웰이 있었다. 어린 선수 위주로 구성된 전자랜드에서 주장 역할을 했다. 국내 선수들을 잘 이끈 포웰은 2014~2015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그러나 상대는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서울 SK였다.
전자랜드가 여러모로 불리했다. 하지만 이변을 연출했다. 6강 플레이오프 첫 경기부터 웃은 것. 또, SK 주포였던 애런 헤인즈의 부상을 잘 활용했다.
포웰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2차전에서 경기를 매듭지는 득점을 했고, 3차전 또한 승부처를 홀로 도맡았다. 4쿼터와 연장전에만 무려 20점을 몰아쳤다. 신들린 득점력을 자랑한 포웰은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 운집한 관중들을 일으켜 세웠다. 전자랜드는 단 3번의 경기 만에 4강 플레이오프로 향했다.
포웰이 이끄는 전자랜드는 원주 동부(현 원주 DB)와의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도 승전고를 울렸다. 전자랜드는 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종전에서 패배. ‘창단 첫 챔피언 결정전’의 꿈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2015~2016
전자랜드에서 세 시즌을 뛴 포웰이었다. 전자랜드와 한층 돈독해졌다. 하지만 포웰은 드래프트에 다시 나서야 했다. KBL이 외국 선수 제도를 변경했기 때문.(10개 구단이 193cm 이하의 외국 선수 1명을 의무적으로 뽑는 것. 그리고 2명의 외국 선수가 특정 쿼터에 함께 뛸 수 있다. 그게 변화의 골자였다)
KCC는 안드레 에밋을 단신 외국 선수이자 1옵션 외국 선수로 영입했다. 그리고 포웰을 택했다. 그러나 포웰의 역할은 많지 않았다. 벤치 출전을 받아들여야 했고, 에밋과의 궁합도 좋지 않았다. 공을 갖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포웰이었기에, 스크리너 역할 혹은 다른 선수의 움직임을 돕는 데 익숙지 않았다.
KCC는 결국 시즌 중에 포웰을 트레이드했다. 전자랜드로부터 허버트 힐을 데려왔다. 포웰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전자랜드로 돌아왔다. 트레이드 후 첫 경기에서 팀을 승리로 견인했다. 포웰은 “인천이 저의 가정이자 집이다”며 인천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포웰과 함께 할 때, 국내 선수들은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포웰 의존도가 한층 심해진 것. 무엇보다 포웰은 장신 선수였기에, 높이 싸움이 이뤄지지 않았다. 전자랜드가 단신 외국 선수를 언더사이즈 빅맨으로 뽑았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포웰과 재회한 전자랜드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프로농구를 뒤로 하고
포웰은 2017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도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부상 중이었던 포웰은 해당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 후 아르헨티나에서 한 시즌을 보냈고, 다음에는 베네수엘라로 향했다. 그리고 농구공을 내려놓기로 했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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