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안 쓰고, 언론 안 타면... 피해자 지원은 '세월아 네월아'
구조금 안내·지급도 센터, 전문가 잘 만나야
구조금 안내 못 받아 신청기한 넘긴 사례도
편집자주
한국일보는 범죄피해자 기획을 취재하며 총 14명의 피해자를 만났습니다. 그 중엔 자기 권리를 잘 인지한 분도 있었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피해자 권리를 알지 못하거나, 경제적 지원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지만, 가족이 생명을 잃거나 자신이 장해를 입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에게까지 '당신 권리는 알아서 챙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피해자에게 자기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릴 필요가 있음에도, 제도를 아는 사람만 지원을 더 잘 챙겨가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복불복 지원'의 현실을 들여다 봤습니다.
"예? 범죄피해자 구조금이 뭐예요? 전 잘 모르는데요."
(범죄피해자 김현숙씨)
범죄피해자 김현숙(가명∙71)씨는 2016년 9월 일터에서 당한 성폭행 범죄로 자궁 등에 전치 10주의 상해를 입고 열흘 넘게 입원했다. 그는 범죄피해자보호법이 정하는 구조금 지급 대상이지만,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 내용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범죄피해자보호법은 △범죄로 전치 2개월 이상 부상·질병을 얻고 △1주 이상 입원 치료가 필요한 경우 등에 중상해 구조금을 지급하도록 한다. 하지만 김씨는 구조금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내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워낙 경황이 없던 때라 잊어버린 것인지, 누락의 경위도 파악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은 첫 입원비와 단돈 50만 원이 전부다. 그 사이 안타깝게도 구조금 신청 기한(범죄피해 발생을 안 날부터 3년)은 이미 지났다.
피해자 지원 안내는 '복불복'
현숙씨 사례에서 보듯, 현실에서 범죄피해자들을 감싸는 구조망은 그렇게 조밀하지도 균일하지도 못하다. 구조금 지급 여부를 '복불복'에 맡겨야 할 수도 있다. 적극적인 전문가가 있는 범죄피해자센터를 만나면 국가에서 보장하는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안내·지원 받을 수 있다. 기부금이 많은 센터라면 센터 자체의 추가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업무에 소극적이거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기관을 만나면 스스로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피해자 스스로 공부하고 쟁취하지 않으면, 구조금 청구는 고사하고 구조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3년의 신청 기간을 그냥 보내버리는 경우도 있다.
2019년 범죄로 남편을 잃은 유수정(가명∙61)씨도 그랬다. 구조금 신청 방법이나 지급 조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구조금은 기소 전에도 신청할 수 있지만, 그는 1심 선고 이후에야 구조금 신청에 나섰다. 그가 찾은 곳은 검찰(담당 기관)이 아니라 법원이었다. 무심한 법원 직원은 "예산이 없다"고 둘러댔다. 갈수록 생계가 어려워져 이미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받은 뒤였다. 합의금을 받으면 가해자를 엄벌에 처할 수 없다. 당시 우울증에 빠져 집 밖을 잘 나가지 않았던 박씨는 구조금 신청을 그냥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변호사 선임해야 겨우 받는 구조금
제대로 안내를 받았어도 심의의 벽을 넘어야 한다. 혼자 넘어서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A씨는 2021년 6월 부산 사하구 주택 화재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평소 가정폭력을 일삼던 부친이 모친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할 정황이 수사 과정에서 일부 드러났지만, 수사 기관은 결국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은 채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A씨가 낸 유족 구조금 신청도 '동반 자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반려됐다고 한다.
결국 A씨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재심을 신청했다. 변호사 조언에 따라 △모친은 자살을 할 이유가 없었고 △과거 부친이 살해 협박을 하기도 한 점을 강조했다. 부친이 화재 직전 만난 사람을 찾아, 헤어질 때 그의 상태가 어땠는지 진술을 받는 등 증거도 모았다. 결국 결국 심의위는 A씨에게 구조금 지급을 결정했다.
구조금 신청을 대리한 한세영 변호사는 "형사절차는 기본적으로 가해자 처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이미 숨진 사건의 경우 수사기관이 형식적 결론만 낼 때가 많다"며 "공소권 없음 사건의 구조금을 신청할 땐 제법 많은 자료 조사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언론 보도 후 태도 바뀌기도
미적대던 구조금 지급 절차가 언론 보도 이후 전격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다. 2021년 살인 범죄로 딸을 잃은 홍모씨는 남겨진 손녀를 위해 구조금을 신청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딸을 살해한 가해자가 사위여서 '친족 제한 규정'에 걸린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살인 사건의 34%(2022년 기준)는 친족 간에 일어난다. 그럼에도 범죄피해자보호법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친족일 경우, 구조금 부지급을 원칙으로 한다. 예외 조항이 있지만 현장에선 세부 조항까지 꼼꼼하게 따지지 않는다. 홍씨의 담당 센터도 그의 사례가 지급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고 구조금 안내를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을 타자 구조금 지급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센터 관계자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미성년 유족이 가해자인 새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있어 지급 대상이 아닌 줄 알고 구조금 안내를 따로 안했다"며 "보도 이후 법무부에서 연락이 와 검찰에 구조금 신청을 해드렸다"고 말했다.
구조금 못 받는 피해자 많아
헐거운 구조망은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2022년 사망에 이른 범죄피해는 2,971건(이하 검찰 분석통계)으로,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 다른 법률로 구제될 가능성이 있는 교통사고, 업무상과실범죄를 제외해도 372건에 이른다. 하지만 같은해 지급된 유족 구조금은 138건에 불과했다.
상해 범죄의 경우, 구조금 지급 대상이 되는 전치 2개월 초과 피해는 연간 848건(교통사고, 업무상과실범죄 포함 6,717건)이다. 같은 해 장해·중상해 지급은 한해 51건에 그쳤다. 합의금 등 다른 종류의 배상을 받았을 것으로 여기기엔 너무 큰 격차다. 취재를 통해 확인된 사례와 비슷한 구조금 누락이거나, 적어도 까다로운 조건으로 구조금 대상에서 제외된 피해자들이 많아 보인다.
구조금을 받지 못한 사례는 법무부 내부 보고서를 통해서도 일부 드러난다. 법무부 설문조사에 참여한 범죄피해자 911명 가운데 178명은 구조금 지급 조건인 '2개월 이상의 신체적 피해를 입었다'고 응답했는데, 구조금 경험을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이는 129명에 불과했다.
헌법상 권리인데... 편차 심한 구조금 지급
피해자에 대한 경제 지원을 사실상 전담하는 검찰도 구조금 누락이 종종 발생한다는 점은 알고 있다. 이를 발굴하기 위해 비정기적으로 점검(스크리닝)을 진행하기도 한다. 구조금 신청 기한이 가까워진 살인 사건의 구조금 지급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수 건의 구조금 누락을 발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 해결을 위해선 애초에 구조금 안내가 누락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일선의 각 센터가 피해자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안내하고 꼼꼼하게 챙겨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평균 근무 인력이 2.5명에 그치는 전국 60개 센터에 현실적인 인력 보강이 필요하다. 법·사회복지 분야 전문가들을 영입하려면 자원봉사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현재의 급여도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
형사처벌이 주업무인 검찰에 피해자 업무를 전담시키면서 국가의 헌법상 책무가 '가욋일'이 되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관련 법상 센터는 위탁기관일뿐, 피해자 지원 및 안내에 관한 법적 의무는 여전히 법무부와 검찰에 있다. 대부분 지원이 피해자가 신청할 때 절차가 시작되기에 꼼꼼하고 지속적인 안내가 필요하지만, 검찰 차원에서의 피해자 권리 안내는 형식적·기계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피해자학회장)는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지역사회에서 만들어진 개별 법인으로 예산도 열악하다 보니 전문성이나 피해자들의 만족도 측면에서 지역별 편차가 있다"며 "체계적 관리를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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