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다음 ‘재파산’…법이 새 출발을 막고 있다
법률상 271개 직종 취업 제한…채무자회생법과 충돌
‘경제적 전과자’ 차별적 낙인에 재파산 3년 새 2배
빚은 가족을 해체하기도 하지만 개인을 고립시키기도 한다. 파산자가 고립을 택하게 되는 까닭은 도덕적 해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더불어 이들을 ‘경제적 전과자’로 내모는 제도적 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형규(가명·38)는 2017년부터 3년 동안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집에서 은둔했기 때문이다. 외출은 가끔 집 앞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음식을 살 때뿐이었다.
이형규는 19살 때인 2005년 전남의 한 소도시에서 수도권으로 이주했다. 뇌혈관에 희귀질환을 앓게 됐는데 서울에서만 치료가 가능했다. 그는 이주하자마자 높은 물가와 마주해야 했다. 게다가 희귀질환 치료인 탓에 건강보험 비급여 검사가 많았고, 약값과 치료비까지 많게는 한달에 150만원씩 부담했다.
질병이 흔들고, 파산이 무너뜨린 청년의 시간
그런데도 질환이 점점 심해지면서 팔과 다리가 경직되기 시작한 탓에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긴 어려웠다. 동대문 시장 지게꾼, 활동지원사,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2016년 이후부터 치료비와 생활비가 한달에 최대 300만원까지 들게 되면서 조금씩 카드 빚이 생겼다. 그 빚은 1년 만에 1200만원을 넘어섰다. 이형규에게 채무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아버지와 동생은 이형규가 과소비를 한다고 여겼다. 이형규는 세상에 내 편이 없다고 느꼈다. 세상과 단절을 택했다.
그래도 이형규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한 시민단체에서 가끔 그의 안부를 물어줬고, 그의 경제 상황을 알게 된 뒤로는 변호사를 통해 파산 신청의 길을 터줬다. 파산 선고는 2018년 3월 나왔다. 그러면서 빚 독촉은 사라졌는데, 다만 사회는 파산자인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이 법을 막는 기막힌 현실
보험설계사로 일을 하려 했더니 보험회사에선 “파산한 분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했다. 보험업법에 ‘파산 선고를 받은 자로서 복권(면책 등)되지 아니한 자’는 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했다. 같은 답변을 신용카드 모집인 지원 때도 들었다.
회계사무소에서도 고개를 내저었다. 심지어 편의점 아르바이트에도 제한이 생겼다. 본사 직영으로 운영되는 편의점은 취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직영이 아닌 곳에서만 취업할 수 있었다. 이형규는 절망했다. “삶이 피폐해지니까 살 이유가 없어졌어요. 집에서 혼자 극단적인 생각도 수없이 했어요.”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채무자회생법)에는 ‘파산 절차 또는 개인회생 절차 중에 있다는 이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취업의 제한 또는 해고 등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이 있다. 파산자의 사회·경제적 복귀를 위해 차별을 방지하는 규정이다. 하지만 이형규가 겪은 일은 파산자들의 보편적 현실이다. 채무자회생법을 무색하게 하는 수많은 차별적 법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빚과 직무수행 능력은 비례하지 않음에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실이 국회 입법조사처에 의뢰해 확인한 결과, 234개의 법률이 규정하는 271개의 직종에서 개인파산이나 개인회생한 사람의 취업과 자격을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무원 임용을 제한하는 국가공무원법 등이 대표적이고, 회계사와 노무사 등 각종 전문직 자격시험 응시도 제한한다. 심지어 아이돌보미, 야생동물 보호원, 연구실 안전 관리사, 청소년 지도사 등의 직종도 파산 선고를 받고 면책 결정 등으로 복권되지 않으면 일할 수 없다.
이에 박 의원은 2021년 11월 파산 선고에 따른 각종 취업·자격 제한 폐지를 뼈대로 하는 234개 법률의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개정안은 대부분 2년이 넘도록 소관 상임위원회 심사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파산 선고를 받고 복권되지 않은 사람이면 남극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던 ‘남극 활동 및 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이 일부 개정돼 남극 활동이 가능해진 것이 유일한 변화다.
법률이 미치지 않는 곳에도 사회적 편견이 여전하다. “회사에 따라 취업규칙으로 파산한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규정을 둔 경우도 있습니다. 파산한 사람은 신용등급이 5년 동안 가장 낮게 설정되는데, 그로 인해 취업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요.” 파산·회생 전문가인 김남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생경제위원장의 말이다.
이런 법적·사회적 차별에 따라 파산을 하고 난 뒤에도 벼랑 끝에 내몰리는 이들이 다시 경제적 고립에 빠지며 채무를 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재파산의 가능성도 커진다.
실직 1년 만에 다시 빚 4천만원
정소영(가명·35)은 22살 때 파산했다. 성인이 된 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게 되면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식비와 생활비로 아르바이트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썼다. 자연스레 카드 빚이 생겼고, 일부를 갚지 못하게 됐다. 원금은 300만원이었는데, 곧 이자가 불어 700만원이 됐다. 사정을 알게 된 아버지가 깜짝 놀라 파산 절차를 밟게 했다. 이 일이 생긴 뒤 아버지는 정소영을 강하게 통제하려고 했고, 새어머니는 눈치를 줬다. 정소영은 견디다 못해 가족이 함께 살던 전북 남원을 떠나 광주광역시로 이주했다.
정소영은 이후 편의점 직원, 치과 보조원, 행정복지센터 공공근로 등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도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서민 대출을 이용했다. 하지만 행정복지센터에서 상담역을 하다 악성 민원인을 만나면서 모든 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공황장애가 왔고, 출근하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1년 전 일을 그만두고 은둔했다. “1년째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어요. 은둔형 외톨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실직 1년 만에 다시 4천만원의 빚이 쌓였다. 정소영은 올해 생애 두번째로 파산 신청을 하려고 한다. 지금은 기초생활수급비 60여만원으로 밥과 라면만 먹으며 살고 있다. “라면이 떨어질 때면 수급자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쌀을 사서 맨밥만 먹고 있어요.”
정소영처럼 재파산을 신청한 사람은 최근 3년 사이 2배나 증가했다.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이 대법원에서 제출받은 현황을 보면, 개인파산으로 면책 결정을 받았던 사람이 다시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건수가 2019년 595건, 2020년 770건, 2021년 998건에서 2022년에는 1021건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도 상반기에만 740건으로 전년보다 추이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파산자 직업 제한은 직업선택 자유 침해”
신동화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간사는 “파산한 사람이 새 출발을 하려면 취업이 돼야 한다. 파산한 사람의 직업을 제한하는 것은 직업선택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의사·간호사 같은 의료인은 파산해도 자격이 상실되지 않도록 법을 고친 선례도 있다. 빚이 많았던 것과 직무수행 능력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는데 취업의 가능성마저 차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송인주 서울시복지재단 선임연구위원은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파산하는 과정에서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파산이나 회생을 겪는 이들에게 재기할 수 있는 지원 체계가 거의 없어서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더 고립된다”며 “파산·회생을 한 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례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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