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시설 같은 싸락눈이 내리는 날엔
시설 같은 눈이 내린다. 구정 명절이 코앞인데, 고향 가는 이야기는 없고, 인력시장 앞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이 줄을 흩뜨리고 돌아선다. 그들이 내뿜는 허연 날숨이 인도를 밀고 지나간다. 오락가락하는 찬바람의 결을 따라 싸락눈이 유성처럼 흐른다.
저만치서 희미하게 다가오던 눈바람 속에 한 노파가 떠밀려서 내게로 온다. 허리는 꼿꼿하지만, 허름한 차림의 노파는 머리에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있다. 제법 커 보이는데, 주저함이 없이 내게로 오고 있다. 어머니다. 아들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이 거침없다.
어머니의 보따리 속에는 언제나 먹거리가 한가득이었다. 쌀 한 말, 무장아찌, 깻잎장아찌, 무말랭이, 그리고 겨울에는 곶감이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열 개씩 다발로 묶여 있었는데, 표피에는 시설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손에 쥐여주시는 곶감을 입에 넣으면서 웃었지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가을이 익어가면 어머니는 아침나절을 감나무 밑에서 계셨다. 감은 충분한 가을빛을 받아 주황빛을 띠고 이파리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긴 장대로 실한 걸 골라 꺾어 내리셨다. 망태기가 주홍빛으로 가득 차면 어머니는 마루 끝으로 옮기시어 껍질을 벗기셨다. 커서 손아귀에 들지 않는 감을 움켜쥐시고 어머니는 잘도 껍질은 벗기신다. 고운 손가락에 드는 거무튀튀한 감물은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오직 자그마한 찬칼을 가지고서 한 망태기의 감을 모두 벗기셨다.
벌거벗은 감을 가는 싸릿가지에 끼어 처마 밑에 매다는 일도 혼자 하셨다. 직사광선이 닿지 않으면서 소슬바람이 스치는 처마 밑은 곶감 말리는 데는 그만이었다. 한보름 말린 감은 어머니의 손안에서 제법 그럴싸한 모양으로 변하면서 우리에게 곶감을 떠올리게 하였다. 단맛이 제법 들었을 텐데, 그것 하나 입에 넣는 법이 없으셨다. 모양 잡힌 곶감을 열 개씩 묶어서 독 안에 깊이 넣어 두고 시설이 피기를 기다리셨다. 옆에서 입 다시고 있던 내겐 장독대에서 마르고 있는 감 껍질이 전부였다.
어쩌다 어머니를 따라 광에 들면 독 속의 곶감은 하얀 분말을 칠하고 어머니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걸 하나 꺼내는 법이 없으셨다. 구정이 코앞에 다가온 장날 어머니는 시설이 핀 곶감을 꺼내시어 장터로 나가셨다. 돌아온 어머니의 손에는 아버지의 탕제가 들려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에 있어서 곶감은 지아비 병구완의 최후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병마를 이기지 못하시고, 떠나신 후 나는 도회지로 유학(遊學)을 왔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여러 자식 가르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당신 손으로 곶감 하나를 입에 넣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토록 소중한 곶감이지만 자취하는 막내를 보러 오실 때엔 언제나 곶감 한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이젠 두 분 모두 안 계시다. 자식이 부모의 깊은 사랑을 깨닫기도 전에 떠나셨다. 그러나 불효한 자식은 구정이 가까워져 오면 싸락눈만 휘날려도 어머니의 그 곶감의 추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싸락눈만 보아도 시설을 떠올리고, 그토록 어려운 살림으로도 요모조모 챙기시며 가정을 꾸리셨던 어머니의 경제원리를 소환하며 나의 경제개념에 한 줌 지혜를 보탠다.
구정 차례상을 위해 시장을 둘러보며, 맨 먼저 챙기는 것이 곶감인 건 어쩔 수 없다. 짚으로 묶어져 있는 곶감 꾸러미를 바라보며 어머니의 손마디를 느낀다. 마루 끝에 앉으시어 열 개씩 헤아리시던 어머니의 셈은 오늘 아들의 셈법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다. 구정이면 곶감 속에 호두를 넣어 맛깔나게 빚어 주시던 건과가 먹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바람을 가져 본다.
"이젠 막내아들 제 목구멍에 풀칠은 하고 사니, 걱정하지 마시고 곶감 하나 드세요."
시설 같은 싸락눈을 맞으며 어머니를 추억한 하루를 곱게 접어 책갈피에 넣는다. 강도묵 대전·세종·충남경영자총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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