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인생은 잘 삭힌 식혜처럼…
지난달 고양시 원당시장의 한 참기름 가게를 취재하다 엿기름을 충동구매했다. 이 가게는 창업 이래 30년간 조치원 지역에서 엿기름을 받아오고 있는데, 갈수록 직접 식혜를 담그는 집이 줄어들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건네받은 식혜에서 자연스러운 단맛을 느꼈다. 맛있는 식혜를 담그는 법을 여쭈니 좋은 쌀과 엿기름을 골라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식혜를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보리의 싹을 틔워 말리고 분쇄한 엿기름을 물에 잘 비벼 풀어서 윗물만 받아낸다. 밥과 함께 잘 섞고 적절한 온도에서, 요즘에는 전기밥솥의 보온 기능을 이용하여 하룻밤 정도 삭힌다. 잘 삭았는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꼬들꼬들한 밥알이 엿기름의 분해 작용으로 간신히 제 모양을 유지하며 풀어져 단물 위로 대여섯 알 동동 떠오르면 삭은 것이다.
이처럼 잘 발효된 상태를 뜻하는 우리말 ‘삭다’의 사동형은 ‘삭이다’와 ‘삭히다’ 두 가지가 있다. 발효시켜서 맛이 들게 할 때는 ‘삭히다’, 화를 가라앉힐 때는 ‘삭이다’를 쓴다. 어쩌면 화를 꾹꾹 눌러 삭이는 것은 밥알이 떠오르기 직전의 식혜를 보온하는 것이나, 소금 친 생선 더미를 항아리에 눌러 담아 젓갈이 되도록 삭히는 것과 비슷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잘 삭아가려면 마치 묵은지를 삭히듯이 시간이 필요하고, 적절한 해소 처리(가스 제거)와 보살핌(적정 온도)이 필요하다.
흔히 부패와 발효는 한 끗 차이라고 한다. 잘 삭은 식혜는 별미지만, 삭아서 물이 된 죽은 버려야 하는 음식 쓰레기다. 오랫동안 곰삭은 젓갈에는 깊은 맛이 들어 있지만, 세월에 삭아버린 옷감은 조각나 흩어진다.
상한 것과 삭은 것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객관적 기준으로 발효 음식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발효 정도에 따라 이를 맛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잘 삭아 제 맛을 갖춘 삶을 판단하는 기준도 각자 몫이다. 잘 삭아 맛있는 식혜가 된 엿기름물처럼 경험을 잘 보살펴 잘 익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 상해갈 것인지 삭아갈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지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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