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평양의 봄
실상은 뇌물 판치는 비리 복마전
배급 끊길라 전전긍긍하는 주민들
“봉쇄 끝났는데 核 때문에 이 모양”
북한 김정은이 집권 후 처음으로 경제 실패를 인정한 건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8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였다. 경제 목표들이 “심히 미진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이 귀를 의심했다. 북한에서 수령은 ‘무오류의 화신’이다. 잘못, 실패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외부 환경과 간부들을 탓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쓴대도 누워서 침 뱉기다. 괜찮은 척하기엔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았다. ‘승리자의 축전’이어야 할 당대회가 코앞이었다. 밑밥을 깔아야 했다.
전원회의 두 달 전 전조가 있었다. 김정은이 주재한 정치국 회의 안건이 ‘평양시민 생활 보장을 위한 당면 문제’였다. 핵심 계층이 모여 사는 ‘혁명의 수도’에서 심각한 식량·전기·생필품 공급 차질을 빚었단 뜻이다. 이걸 공개했다는 것도 이례적이다. 이듬해 1월 8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은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는 표현을 썼다. 동요하는 엘리트층과 험악해지는 민심을 다독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부촌이라는 개성에서도 아사자가 쏟아졌다. 회의 때마다 경제난을 자인하며 간부들을 질책하는 게 일상이 됐다.
최근 묘향산에서 정치국 회의를 소집한 김정은이 “지방 인민들에게 초보적 생필품조차 제공 못 하는 건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며 간부들을 향해 “말로 굼땐다(때운다)” “결단과 용기가 없다”고 질타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1박 2일간 김정은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지방’이었다. 첫날 22차례, 둘째 날 37차례였다. “지방의 세기적 낙후성” 운운하며 도농 격차 해소를 강조했다. ‘지방’으로 점철된 연설문 행간에 ‘이제 평양은 살 만하니 지방만 살아나면 된다’는 내부 선전 의도가 뚜렷했다.
김정은이 믿는 구석은 ‘평양 5만 세대 살림집 건설’ 사업이다. 3년 전 당대회 때 약속했다. 경제가 나락에 빠져 백지화하다시피 한 ‘5개년 계획’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청년 돌격대와 군인을 총동원해 2022년 송화지구에 1만 가구, 2023년 화성지구에 1만 가구를 완공했다. 오는 4월 입주를 목표로 화성지구에 추가로 1만 가구를 짓고 있다. 핵무력 고도화에 버금가는 김정은의 치적으로 선전한다. 지방에 가야 할 인력과 자원을 몽땅 끌어다 썼다. 평양 민심을 잡기 위한 몸부림이다.
정작 주민들은 냉소적이다. ‘평양 뉴타운’은 겉모습만 초고층, 초현대식이다. 제한 송전으로 승강기는 장식품이 돼 70~80층을 걸어 다니고 난방·온수 공급도 엉망이라 옷을 몇 겹씩 껴입는다. 주거 환경이 나은 ‘로열동’ ‘로열층’은 정권 실세들에게 뒷돈을 댄 사람들 차지다. ‘제대 군인, 과학자, 교수 등에게 우선 배분한다’는 배정 원칙은 진작에 무너졌다. ‘누구에게 얼마를 쥐여줘야 화성지구 입사증(입주허가권)이 나온다’는 필승 공식이 돌아다닌다. 당 서열 10위권 안팎의 군수·경제 담당 정치국 위원 2~3명이 가장 확실하다고 한다. 리선권, 현송월도 수완이 좋은 편이다. 주민들은 “저렇게 받아먹어도 멀쩡한 걸 보니 과연 실세”라고 수군댄다. 이들 눈에 화성지구는 김정은 치적이 아니라 복마전이다.
300만 평양 주민 대다수는 김정은 정권을 떠받치는 당·정·군 엘리트와 그 가족들이다. 뉴타운에 실망했다고 돌아서진 않는다. 이들을 김씨 왕조와 3대째 운명 공동체로 묶어주는 핵심 고리는 배급이다. 평양에서 배급제가 작동하는 한 김씨 정권은 유지된다. 요즘 평양에선 국영 상점, 시장에 가도 생필품을 구하기 어렵다. 전기는 걸핏하면 끊기고 유류 공급도 빠듯하다. 식량 공급만 간신히 이뤄진다. 이마저도 ‘모든 곡물을 평양에 우선 공급하라’는 김정은의 특별 방침 덕분이다. 코로나 봉쇄 당시보다 나아진 게 없다. 모든 게 김정은의 핵 집착 때문임을 주민들도 안다. 그런 김정은 뒤에서 호가호위하는 측근들은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다. 평양의 봄은 아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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