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잘못 대응하면 김치가 ‘기무치’ 된다”

김태훈 2024. 2. 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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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푸드 효자상품 된 김과 김치
재외공관 외교관 노력도 한몫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 위해
경제·안보 융합 외교 필요한 때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의 일이다.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할 가능성이 점쳐지며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를 자처하고 평양으로 떠났다. 김일성과 회담을 마친 그는 청와대에 들어갔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둘이 식사를 함께하는데 밥상에 구운 김이 올라왔다. 카터는 “나는 이 음식이 처음”이라며 “어떻게 먹는지 모른다”고 털어놨다. YS는 “해초류인데 장수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이어 “편리한 대로 손으로 먹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카터는 주저함 없이 덥석덥석 손으로 김을 집어 먹었다. 손님을 대접하는 입장에서 YS도 똑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청와대 공보수석이던 주돈식 전 문화체육부 장관의 회고록에 나온 에피소드다.
김태훈 논설위원
갑자기 김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읽은 기사 때문이다. 2023년 김 수출액은 7억9100만달러(약 1조552억원)로 잠정 집계되며 사상 처음 7억달러를 넘었다. 30년 전만 해도 김이 음식인지, 아니면 식사 도중 손을 닦는 종이인지 헷갈리는 외국인이 많았다. 요즘은 카터처럼 덥석덥석 손으로 김을 집어 먹는 외국인이 흔하다.

김이 K푸드 효자 상품이 된 데에는 당연히 기업인들 공로가 제일 크다. 여기에 세계 각국 재외공관에 나가 있는 외교관들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다. 외교부가 출범한 이래 모든 재외공관에는 공사든 참사관이든 경제담당관이 배치됐다. 수출 증대가 그들의 핵심 임무였다. 한국과 교역이 미미한 나라나 지역의 공관장들은 본부의 따가운 질책을 받아야 했다.

해외 시장에서 한국의 존재감과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1990년대 초반 주일 한국대사관의 경제공사를 지낸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김치’ 얘기가 흥미롭다. 당시 일본 업계에서 대규모 김치 공장을 지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잔뜩 긴장한 대사는 경제담당관과 경제부처에서 파견된 주재관들을 소집했다. “우리가 잘못 대응하면 김치가 ‘기무치’(김치의 일본식 발음) 된다”고 경각심을 고취했다. 대사관은 업계 동향을 주시하며 우리 김치 알리기에 나섰다. 오늘날 김치는 K푸드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경제·안보 융합 외교’를 외쳤다. “민생을 챙기기 위한 외교에 적극 나설 것”이라며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전임자들과 달리 장관이 된 뒤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을 찾아 재계 목소리부터 들었다. 외교부 안에서도 경제·통상 분야에 오래 몸담은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교부 2차관 출신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임명 당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은 “외교관이 중소기업을 아느냐”고 파상 공세를 펼쳤다. 이는 비판을 위한 비판에 불과하다. 1983년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공직자 중 김동휘 상공부 장관이 있다. 평생 외교관 생활만 하다가 외교차관을 거쳐 상공장관이 된 인물이다. 외교와 무역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사권자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과거 동력자원부라는 중앙부처가 있었다. 상공부와 합쳐 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가 되었다. 그 동자부 역대 장관들 면면을 보면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거쳐 장관직에 올랐거나 장관 근무를 마치고 사우디에 대사로 나간 사례가 눈에 띈다. 우리가 원유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사우디와의 관계를 중시한 결과로 풀이된다. 전쟁 등으로 에너지 공급망이 과거 어느 때보다 불안해진 시대에 외교와 경제는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우리 수교국 중에는 정무보다 경제의 비중이 더 큰 나라가 대부분일 것이다. 중동 산유국, 동남아와 중남미의 자원 부국, 서유럽의 기술 강국 등이 그렇다. 외교관 출신이 경제부처 요직을 맡는 것이 이상하지 않듯 이런 국가들에 내보낼 공관장으로 굳이 정통 외교관 출신만 고집할 필요도 없다. 조 장관 말처럼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적극 지원”할 대사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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