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20년 동안 한결같은 ‘법조계 봉사왕’
어제(2월 6일자) 아침 신문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사람들’면에 실린 사랑샘 재단 이사장 오윤덕(82) 변호사입니다. 오는 26일 서울대 졸업식에서 축사를 맡았다는 소식을 사회부 박정훈 기자가 썼습니다. ‘법조계 봉사왕’으로 불릴 정도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온 공로로 초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참 한결 같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오 변호사를 처음 뵌 것은 2004년 6월이었습니다. 거의 20년 전이네요. 세상은 그 사이 많이 변했지만 오 변호사의 선한 미소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20년 전 신림동 고시촌은 삭막했습니다. 건물마다 ‘고시원’ ‘관(館)’ ‘법학원’ 등의 간판이 즐비했지요. 그런 거리 가운데 자리한 사랑샘은 정말 맑은 샘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고시촌 상가 건물 100평에 휴게실, 명상실, 상담실, 강당 등을 갖춘 쉼터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차와 음료수, 컵라면과 과자 등을 무료로 먹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2003년 2월 오 변호사가 사재를 털어 문을 열고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니 당시 ‘고시에 지친 마음, 신앙의 품에서 달래-신림동 고시촌 사랑샘’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더군요.
오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몇 차례 낙방 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생활을 하다 1994년 변호사 개업을 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오 변호사는 고시촌이 상주인구 3만~5만명에 길게는 7년씩 머무는 곳이지만 공부와 유흥 말고는 머리를 식히고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없어서 사랑샘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가톨릭 세례를 받은 지 5년 정도 지난 상태였던 그는 “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종교적 위안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며 “종교가 주는 위안을 젊은이들에게 나누고 싶다”고도 했지요. 당시 오 변호사는 사랑샘에 ‘올인’하고 있었습니다. 형사 재판과 대학 강의는 맡지 않고 오후 6시반이면 사랑샘으로 직행해서 젊은이들을 챙겼고, 아내 권혜옥씨도 매일 오전 11시~오후 8시 사랑샘 살림을 돌봤지요. 일요일엔 더 바빴습니다. 일요일 오전에 희망자들과 인근 삼성산 가톨릭 성지로 등산을 갔다가 오후엔 미사, 저녁엔 ‘사랑샘 일요 강좌’까지 열었으니까요. 일요 강좌엔 법조인뿐 아니라 당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란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졌던 현각 스님 등 이웃종교인들도 초청해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후배 기자가 쓴 인터뷰 기사에선 봉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내 권씨로부터 “집에 돈만 밝히는 마귀 한 마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는 한마디를 듣고 봉사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20년 전 제가 인터뷰할 때엔 듣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더욱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사랑샘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랑샘이 입주했던 신림동 건물이 재개발이 되면서 2011년 쉼터는 문을 닫게 됐습니다. 인근에선 그만한 규모의 공간을 다시 임차하기도 어려웠답니다. 오 변호사 부부는 임대보증금 5억원을 대한변협에 기부했고, 2012년 대한변협사랑샘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2015년에는 대한변협에서 독립하고 오 변호사가 1억원을 추가로 출연해 ‘재단법인 사랑샘’이 설립됐고, 오 변호사는 이사장을 맡았답니다. 이번 기사를 읽으니 오 변호사는 지난 20년 동안 사랑샘 쉼터 이후에도 청년 공익 변호사를 발굴해 외국인 근로자와 노숙인 등의 권익 보호를 돕고, 새터민 로스쿨 장학 지원, 아동센터 운영 지원에도 힘썼다고 하네요. 2009년에는 서울대 법대 동창회가 주는 ‘제17회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년 전과 지금, 오 변호사의 말씀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탈락자’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20년 전 인터뷰 때 오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시 합격자든, 낙방한 사람이든 정신적인 문제가 남습니다. 합격자들은 국가와 사회를 위하고 이웃에 봉사하려는 올바른 신념을, 최선을 다하다 다른 진로를 택하는 사람도 하느님이 자신에게 맞는 재능을 주셨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오 변호사는 ‘변시 오탈자’를 걱정했습니다. ‘변시 오탈자’는 변호사시험에 5번 낙방해 더 이상 시험을 볼 수 없게 된 경우를 가리키지요. 오 변호사는 이들에게 1인당 200만을 지원해주는 ‘마중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번에도 오 변호사는 “인생의 진로는 꼭 한 곳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고 뜻밖의 직장이 어느 순간 찾아오기도 한다”며 “아직은 잘 보이지 않겠지만 지평선 너머에 여러 가지 살아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용기를 냈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20년 전 인터뷰 내용과 표현만 조금 바뀌었을 뿐 같은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인생 선배이자 사회의 어른으로서 참 따뜻한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취재원을 만나게 됩니다. 선행을 하는 분도 많지요. 그렇지만 20년을 한결같이 똑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교인들도 초심을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선한 일에 대한 기사를 썼다가 후에 그 주인공의 변한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 변호사는 왠지 한결 같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기사를 통해 그 변치 않는 모습을 확인하게 되니 더욱 기뻤습니다.
오 변호사 부부는 20년 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도 했지요. “이곳에 들른 고시생들의 기쁜 표정 하나, 조용히 ‘고맙다’고 하는 한마디가 더할 수 없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이곳을 거쳐간 젊은이들이 나중에 각자의 위치에 맞게 또다른 형태의 사랑샘을 만들어 다른 이들을 도왔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 졸업식에서 오 변호사님이 어떤 축사를 들려주실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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