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표범 덮친 멧돼지의 반격 “뜯어먹히니까 아프냐?”
발굽달린 초식동물에서 잡식으로 진화
뱀, 새, 사슴새끼까지 잡아먹어
가축 돼지와 교배하며 세계 전역서 번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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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세계에서 ‘약자의 복수’만큼 환호를 이끌어내는 서사가 없습니다. 늘 쫓기고, 잡아먹히며 강자의 이빨과 발톱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먹잇감들이 자연의 룰을 뒤집고 반격에 성공하는 장면이 주는 장면만한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또 있을까요? 개구리의 입속으로 삼켜지기 직전 처절하게 절규하는 뱀, 사자를 너덜너덜하게 짓뭉개는 물소, 악어를 그 자리에서 핸드백용 가죽으로 만들어버리는 코끼리의 일격에 그래서 우리는 열광합니다. 지금 보실 이 짧은 소셜미디어 영상(instagram wildlifebrutal) 도 그런 반전의 서사를 담고 있어요.
인도는 내노라하는 괴수들이 총집합해있는 생태의 보고입니다. 고양잇과 맹수 6대 천왕 중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두 종류(재규어·퓨마)를 빼고, 네 종류가 둥지를 틀고 있어요. 호랑이와 표범은 터줏대감으로 완전히 자리잡았고,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자도 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자취를 감춘 치타 복원 사업도 시작됐거든요. 이곳의 자연을 호령하면서 때로는 사람들까지 공포로 몰아넣는 맹수 표범이 횡액을 당하는 동영상이 포착됐습니다.
남부 타밀나두주의 코다이카날의 한 숲길에서 촬영된 건데요. 세 마리의 멧돼지에게 습격당해 전신을 물어뜯기고 있는 이 표범은 짧은 몇초의 순간 만으로도 ‘온전하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게 합니다. 동영상이 촬영되기 전부터 공격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 자체가 먹잇감이기 전에 괴수인 멧돼지를 거꾸러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한마리도, 두마리도 아닌 세마리가 달려들었어요. 마치 전신마사지를 하듯 놈들은 표범의 몸뚱아리를 공략했어요. 한마리가 머리를 물고 다른 한마리가 앞발과 가슴팍을 물어뜯는 사이 나머지 한 마리는 꼬리 부근을 조준했습니다. 이렇게 세 마리의 괴수 사이에 물어뜯기는 경험도 표범에겐 처음이었을 겁니다. 이 혈투 사이에서 눈을 부릅뜬 멧돼지들은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르겠어요. “뜯어먹히는 기분이 어떠냐. 아프냐? 우리도 아팠다. 이 XXX아~”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멧돼지 한마리를 공략해서 숨통을 끊고 여느 표범들과 마찬가지로 목덜미를 물고 나뭇가지로 올라가서 싱싱한 육사시미를 즐길 요량이었을테죠. 하지만 무리 생활을 하며 사회성이 강한 동료 멧돼지들이 곧바로 달려들면서 전세가 바로 역전이 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상당부분 공격이 진행됐는지 표범의 몸뚱아리가 축 늘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표범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하더라도 치명상을 입을 공산이 큽니다. 최후의 승자가 멧돼지들이었다면, 단지 천적의 제거에 그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001년 개봉된 영화 ‘한니발’에서는 주요 빌런 중 한 명이 자신이 식인괴수로 사육하던 돼지들에게 끔찍하게 희생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멧돼지의 식성을 감안하면 완전한 허구라고 단정짓기 어려워요. 이들의 식단에는 뱀·개구리·도마뱀·새끼사슴 등도 포함돼있거든요.
멧돼지가 섬뜩한 이유중 하나는 발굽을 가진 초식동물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에서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육식으로의 입맛을 길들인 적극적 잡식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피와 살에 의존하는 육식동물이지만, 주변환경에 맞춰서 사실상의 초식동물이 돼버린 소극적 잡식동물 판다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경우죠. 이렇게 풀과 열매, 피와 살을 골고루 탐하는 멧돼지의 습격이 훨씬 폭 넓은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와 호주입니다. 습격의 대상은 표범 같은 맹수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예요.
북아메리카와 호주는 본래 원주민들의 땅이었지만, 유럽에서 건너간 개척민들에 의해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개간됐다는 특징이 있죠. 이들이 집돼지와 교배시켜 좀 더 풍성한 고기를 얻고 사냥도 즐기기 위해 들여온 멧돼지가 그만 화근이 됐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은 살지 않았던 낯선 땅에 완벽하게 적응하면서 토종 생태계를 파괴하며 차원이 다른 형태의 역습을 시작한 겁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최신호에서 캐나다의 최악의 외래종으로 등극한 멧돼지에 관한 기사를 소개해 눈길을 끕니다. 북극과 로키산맥, 대평원을 품은 대자연의 낙원으로 알려진 캐나다가 지금 괴물 돼지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1980년대 육질 향상에 부심하던 양돈업자들은 유럽산 멧돼지를 들여와 기존의 집돼지와 교배합니다. 양돈업자들의 전략은 맞아떨어졌어요. 기존 돼지보다 훨씬 고기도 많이 나오는 초대형 돼지가 생산됐거든요.
문제는 이후 돼지고기 시장이 와르르르 무너지면서 수요가 폭락했다는 겁니다. 사료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양돈농들이 택한 방법중의 하나가 ‘방출’이었습니다. 어차피 도축될 운명이었던 놈들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인류애적 자비심, 토착 짐승이 아니었으니 금세 죽거나 곰·늑대의 밥이 될 거라는 안일한 심산도 있었게죠. 그런 안일함이 재앙이 됐습니다. 교잡으로 인해 이들은 엄청난 살집 뿐 아니라 파워와 피지컬로 무장한 괴수가 됐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멧돼지 신을 방불케하는 존재로요.
멧돼지들에게 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상이 살던 유라시아의 삼림과 캐나다의 숲은 별반 다를바가 없었어요. 돼지가 물을 만났습니다. 원래 집돼지였던 놈들, 유럽서 들여온 멧돼지들, 둘 사이에 태어난 교잡종, 혈통도 유입경로도 다른 놈들이 ‘돼지’라는 정체성으로 야생에서 또다시 뒤엉키고 흘레붙으면서 그들만의 왕조를 구축합니다. 많게는 한마리에 열마리까지 넘게 낳는 이들의 다산 기질은 대대손손으로 번성하는 확고한 동력이 됐어요.
캐나다 정부가 퇴치의 필요성을 계도하면서 예시로 든 돼지들의 해악은 섬뜩합니다. 우선 대대손손 이곳에서 살아온 산새와 물새, 도롱뇽과 두꺼비, 뱀과 도마뱀 등 짐승들이 새로운 천적을 만나 씨가 마르기 시작했어요. 작은 새들, 그 새들이 고이 품고 있던 알들까지도 멧돼지의 입속에서 와그작 와그작 산채로 믹서기처럼 갈려 곤죽이 돼 뱃속으로 직행합니다. 문제는 멧돼지들의 포식이 이렇게 ‘작은 야생동물’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멧돼지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확인된 먹잇감 중에는 갓 태어난 염소·양·송아지까지 있었습니다. 돼지·염소·양은 모두 짝수의 발굽을 가진 소의 무리(우제류)예요. 대표적인 거대 초식동물 집안인데, 한 집안 내에서 어떤 놈(돼지)들만 유독 피맛에 홀려 한 집안 다른 족속을 잡아먹는 동족살상의 괴수로 변모해간겁니다. 짐승 입장에선 그저 야들야들한 육질의 별미일 뿐이죠.
여기에 덤불을 파헤쳐 서식처를 만들고, 진흙속에서 뒹굴면서 기생충을 떨어버리는 이들의 습속 탓에 숲의 작은 연못과 웅덩이는 급격한 퇴적과 부영양화로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사람과 가축이 먹을 작물을 기르던 경작지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정도는 그나마 ‘젠틀하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비롯한 온갖 전염병의 감염원입니다. 각국 정부가 멧돼지 퇴치를 위해 묘안을 짜내고 있지만, 퇴치는커녕 서식지역은 점차 넓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멧돼지와 야생화된 집돼지, 그 혼종들은 열심히 흘레붙고, 한 배에 열마리 안팎의 새끼를 낳으면서 풀과 열매를 뜯는 동시에 피와 살점, 내장을 폭풍흡입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혼종과 교배를 통해 더욱 더 힘세고 산더미만한 몸집을 가진 괴물돼지들이 양산될겁니다. 어쩌면 퓨마·재규어·회색곰에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거꾸러뜨리는 괴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도에서 표범을 물어뜯은 멧돼지들의 포효는, 훗날 인간의 터전마저 정복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일굴 이 짐승들의 찬란한 역사의 전주곡일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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