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후 ‘제주’ 지우려 애쓴 75년…97살 돼서야 비로소

허호준 기자 2024. 2. 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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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생존 수형인 오씨 할아버지, 재심서 무죄
6일 부산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모의법정에서 열린 제주4·3 재심 재판이 끝난 뒤 4·3 생존 수형인 오아무개씨가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가고 있다. 허호준 기자

두 번 다시 제주 땅을 밟지 않았다. 그 세월이 75년이다. 고향 제주 중산간 마을의 흙냄새가 그립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그리웠지만 외면했다. 눈을 감고 누우면 하얗게 눈 덮인 한라산 자락과 동네에 있던 늙은 팽나무,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감나무가 어른거렸다.

제주를 떠날 때 22살 청년은 올해 97살의 백발 할아버지가 됐다. 제주 출신이라는 사실을 지운 채 살아왔고, 4·3 희생자라는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 놔뒀다. 고향의 소식이 간간이 바람결에 들렸지만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두 번 다시 고향에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바꾸면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본적을 바꿨고, 머릿속의 ‘제주’라는 단어를 지우려고 했다. 자식들도 지난해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을 만큼 자식들 걱정 때문에 극도로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그의 딸(63)은 “아버지께서 고향 제주에 대해서는 말씀을 하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이제서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게 고향이었다. 그의 말투에는 여전히 제주사투리가 남아 있다.

제주지방법원 형사4-2부(재판장 강건)가 6일 부산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모의법정에서 4·3 생존 수형인 오아무개씨에 대한 재심 재판을 열고 있다. 허호준 기자

제주지방법원 형사4-2부(재판장 강건)는 6일 오후 3시 부산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모의법정에서 열린 오아무개(97)씨의 직권재심 첫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오씨는 1949년 7월 군사재판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4·3 수형인’이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이 아픔을 겪은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며 “공소사실을 인정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광주고검 산하 제주4·3사건직권재심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은 오씨가 4·3 희생자로 결정되지 않아 4·3특별법에 따른 특별재심 요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의 진술과 관련 자료 등을 검토해 형사소송법에 의한 직권재심을 청구했다. 이 과정에서 건강 상태와 출소 뒤 한 번도 제주도에 가보지 않았고, 부산에서 재판을 받기를 희망한다는 오씨의 바람으로 법원은 법원조직법에 따라 오씨의 거주지 인근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모의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하게 됐다.

오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건 4·3이었다. 제주의 중산간 마을 의귀초등학교 교사였던 오씨는 초토화 시기 집이 불타고 주민들이 닥치는 대로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 산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경찰에 넘겨진 뒤 기절할 때까지 가혹 행위를 당하다 1949년 7월 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다.

오씨는 1949년 7월 악명 높은 집단수용소인 제주주정공장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제주 청년들과 함께 자그만 화물선 밑창에 처박힌 채 육지로 끌려갔다. 이날 배에 탄 제주 청년은 300명이다. 같은 배에 탄 누구도 어디로 가는지, 죄명은 무엇인지, 형량은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전남 목포에 내린 이들은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대구형무소로 갔고, 그곳에서 형무관(교도관)으로부터 “제주도 출신들은 15년형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고난과 죽음의 수형 생활이 시작됐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이들은 1950년 1월 부산형무소로 이감됐다. 200여명 정도가 열차에 탔다. 3.8평 정도 크기의 방에 42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한국전쟁을 만났다. 수용됐던 사람들이 형무관이 부르면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20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먼저 불려 나갔고, 그다음은 15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번호 순서대로 불려 나갔다. 그렇게 한방에 20여명이 있다가 나중에는 7~8명밖에 남지 않았다. 감방 안에 있던 제주 청년들은 불려 나가 총살당하거나 바다에 수장된다는 소문에 감방 안은 공포의 도가니였다.

전쟁이 수그러들자 오씨는 1950년 10월 마산형무소로 이감됐다. 제주 청년들의 수는 더 줄어 있었다. 100여명 정도 수감돼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마산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한 수형인은 생전에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죽어도 한 방에 있으면 죽었다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같이 누워서 잔 뒤 다음 날 아침 그 사람분의 밥을 더 받아 나눠 먹었다”고 했다. 오씨는 징역 7년6개월로 감형받고, 1954년 10월 부산형무소로 다시 이송된 뒤 1956년 2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그 뒤 오씨는 부산에 터를 잡고 제주에 가지 않았다.

오씨는 이날 법정에서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 쏘아 죽인 역사적 잘못을 반성하고 이를 바로잡고 앞으로는 법을 바로 세워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오씨의 딸은 “아버지가 무죄판결을 받아 명예회복이 이뤄져 감사하고 남은 여생을 편히 지내기를 바란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한테 ’제주도 사람이우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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