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칼럼] 30센티미터 높이에서 떨어져도…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의 딸 돌잔치에 다녀왔다. 후배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불편한 걸음으로 음식을 날랐다. 앞으로 몇달 동안이나 더 깁스하고 있어야 하고 그 뒤에도 한동안 재활치료를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출근하다 다쳤는데 산업재해 인정은 받았고, 사업장 산재 발생 건수에는 포함되지 않아 다시 복직해 일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며 안도하는 눈치다.
나는 “헌법재판소에서 출퇴근 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출퇴근 재해가 산업재해로 인정된 뒤에 다쳐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헌법재판소가 노동문제에 관해서 유일하게 잘한 결정이 그거 하나다”라며 아는 척을 했다. 노동 상담 일을 오래 했던 사람이 갖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틀린 말도 아닌 게, 만일 헌법불합치로 법령이 개정되기 전에 다쳤다면 그 후배는 몇달 동안 수입이 한푼도 없었을 것이고, 막대한 치료비를 부담하고 후배를 간병하느라 가족 중 한명은 일이나 학업을 중단해야 했을 것이다. 흔한 말로 “집안 기둥뿌리가 뽑히고 풍비박산 나는” 상황이 벌어졌을 확률이 높다. 무상 의료제도가 시행되지 않는 사회에서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살고 죽는 것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옆자리에 앉았던 다른 후배는 “우리 남편도 얼마 전에 일하다가 자재가 몸 위로 쏟아지는 바람에 아찔했던 사고를 겪었어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라고 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사고는 그만큼이나 일상적이다.
건너편 자리에는 영화배우 마동석씨를 닮은 인상의 건장한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저는 철거 현장을 찾아다니며 일하는 사람인데요, 건설 현장보다 철거 현장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바로 며칠 전에도 나는 분명히 이쪽 천장을 부쉈는데 저쪽 천장이 와장창 무너지면서 내 가슴을 치더라고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정도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지만 무너지는 천장에 가슴을 맞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으랴.
내가 “혹시 건설노조 조합원이시냐?”고 묻는 바람에 대화는 노동조합에 관한 쪽으로 옮겨갔다. 건설노조 역할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노조 간부들의 품성에 대한 품평이 한동안 쏟아져 나왔다.
딸아이 첫돌을 축하하는 자리의 대화로는 너무 무겁다고 느껴져 방향을 좀 바꿔보려 했으나, 누가 “총선과 대선에 관해 어떻게 예상하느냐?”고 묻는 바람에 한층 더 진지한 대화로 이어졌고, 결국 “이게 바로 86세대의 폐단일지도 모른다”라는 자각을 하고 나서야 그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에 관한 내용으로 겨우 대화의 중심을 옮길 수 있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꺼내지 못한 사건 하나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 사건에 관한 짧은 글을 쓴 바로 다음날이었다. 더욱이 그날 첫돌을 맞은 주인공의 아빠인 후배의 글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지난달 26일 낮 충북 진천군 한 마트에서 30㎝ 높이 플라스틱 상자에 올라가 설 명절 상품진열대를 설치하기 위해 나사못을 조립 중이던 노동자가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는데 사고 뒤 이틀 만에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사고가 난 마트는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지난달 27일부터 이들 사업장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확대 적용됐지만, 사고 발생 시점이 하루 전날이라 법 적용을 면했다는 내용을 언론들은 빼지 않고 언급했다. 마치 그 사업자가 처벌을 면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사고는 그만큼이나 일상적임에도 30㎝ 높이에서 떨어져도 노동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기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을 합쳐 오늘도 우리나라 어디에선가는 하루에 6명꼴로 노동자들이 죽어 나간다. 다른 나라 노동자들은 이렇게 많이 죽지 않는다. 통계지표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어느 기준으로 따져도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노동재해 사망률은 다른 나라들보다 몇배나 높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 인구 5천만 이상 나라 중 1인당 국민소득 세계 6위를 자랑하는 경제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언제까지 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야 하는가?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거의 줄지 않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아니라 더 심한 규제도 지나치다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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