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애 등장과 北 세습통치의 미래[김상운의 빽투더퓨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한에 핵 위협을 노골화하는 가운데 딸 주애와 주요 현장을 순시하는 장면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애가 후계자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란이 벌어진 데 이어 지난달 국가정보원은 “현재로선 주애가 유력한 후계자로 보인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남성 중심의 북한 사회 속성상 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고 한 기존 분석을 사실상 수정한 겁니다.
11살짜리 아이의 등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학계와 정부까지 나서 의미 분석에 여념이 없을까요. 북한의 수령제와 세습통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이 주석직 승계를 3년간 미룬 것을 놓고 ‘북한 붕괴론’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대 세습통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보려면 김일성 집권기로 시계를 돌려봐야 합니다(정치학자 후안 린츠의 저서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세습제 단초 제공한 ‘갑산파 숙청’
하지만 1967년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파가 모조리 제거되면서 정치·사회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경제는 침체일로를 걷게 됩니다. 갑산파 숙청은 주체사상 태동으로 이어져 세습제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죠.
1960년대 후반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의 다양성 말살은 역사해석에서도 확인됩니다.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무렵 김일성이 조선시대 실학파에 대한 갑산파의 해석을 강하게 비판한 게 대표적입니다.
당시 갑산파는 조선 실학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목민심서를 당 간부들의 필독서로 지정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정체되기 시작한 북한의 사회, 경제체제를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조선 성리학의 폐쇄성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실학자들의 업적에 주목한 겁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갑산파가 사회주의 애국주의를 왜곡해 봉건 유교사상을 부활시켰다고 비판했죠.
그런데 김일성 일파가 비판에 나선 진의는 갑산파가 실학자들의 업적을 김일성의 혁명전통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항일 무장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김일성만의 것으로 독점하기 위해 연안파 등 기타 사회주의 세력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운 김일성 일파는 실학자들의 업적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조선로동당이 줄곧 비판해온 조선성리학의 폐단을 개선하고자 한 실학자들의 노력마저 ‘반혁명’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유일 지배체제의 독단성 내지 폐쇄성은 이미 1960년대부터 극에 달했던 셈입니다.
술탄주의 국가로서 북한의 특성
북한은 ▲건국 초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스탈린주의를 유일 지배체제에 합당하도록 수정, 변형해 ‘주체사상’을 내놓은 점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이후 당 안팎에 독자적인 정치·사회영역이 말살된 점 등을 미뤄볼 때 술탄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 세습통치의 뼈대를 이루는 주체사상은 수령을 당과 국가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로 규정합니다. 학계에선 주체사상을 중국 마오쩌둥주의 혹은 소련 스탈린주의의 ‘북한판 변형’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투쟁을 벌이며 개인숭배를 강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 스탈린 개인숭배가 결정적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런데 스탈린 사후에 열린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하자, 김일성은 일대 혼란에 빠지죠. 노동신문에 연일 스탈린의 동정을 보도하는 등 소련에서 개인독재의 정당성을 찾아온 김일성 일파로서는 일종의 ‘통치 모순’에 맞닥뜨린 겁니다. 1950년대만 해도 말끝마다 민족주체를 내세우는 지금의 북한과는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소련에 의존적인 행태를 보였었죠.
결국 김일성은 종파투쟁을 계기로 갑산파 숙청을 거치며 유일 지배체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소련의 탈(脫) 스탈린주의로 인해 수령 우위 당국가 체제를 유지하는데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해방 직후 김일성과 조선로동당이 통치체제의 정당성을 스탈린주의에서 찾았으나, 유일 지배체제가 형성된 후에는 ‘변형된 스탈린주의’랄 수 있는 주체사상을 내세운 겁니다.
술탄주의에서 통치자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김정일 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16년간 북한을 공동 통치하며 주체사상의 설계와 실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김일성 사후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통치 질서가 흔들리자, 군대를 앞세운 ‘선군사상’을 내놓습니다. 이는 ‘주체사상’에 대한 보조 통치담론으로, 수령-당-인민대중의 3대축을 기반으로 한 주체사상에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한 겁니다.
김정일보다 승계기간이 훨씬 짧았던 김정은에 이르러서는 김정일이 키운 군부의 권력이 도리어 부담이 됐죠. 이에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내걸고 당의 권한과 지도를 강화해 군부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이처럼 북한에서 수령과 그의 후계자는 주체사상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새로운 통치담론을 내놓습니다. 김정은의 딸 주애가 성인이 돼 후계자로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또 다른 ‘주애 사상’이 나올 수 있단 얘깁니다.
술탄주의의 또 다른 특성인 독자 시민사회 영역의 부재는 북한에서 해방 직후 사회주의 전환이 동구 유럽보다 빠른 속도로 이뤄진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북한의 경우 폴란드와 같은 무장투쟁 세력이나 조직화된 반공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6.25전쟁 이전에 지주, 종교인, 지식인 등이 대거 월남해 공산화가 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권력세습기 엘리트간 갈등 주목
시계를 김정일 생전인 2008년으로 돌려볼까요. 그해 8월 김정일은 뇌경색에 빠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전에 군부에서 제기했으나 김정일에 의해 중단된 후계 논의가 재개되고, 이듬해 1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됩니다.
김정일은 자신이 죽고 나서 후계체제를 안착시킬 측근으로 매제인 장성택을 선택하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선군체제로 위기를 돌파하면서 몸집이 커진 군부를 장성택을 앞세워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후 선군시대를 이끈 3인방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총참모장이 배제되고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철 총정치국장 등으로 대체됩니다. 이어 군부의 대표적인 외화벌이 업체인 승리무역합영회사를 장성택 휘하의 조선로동당 행정부로 편입합니다. 그 외에도 군부의 각종 이권사업을 빼앗죠.
하지만 군부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습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수령에 오른 김정은은 크게 확대된 장성택 세력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지배연합 내 엘리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유지해야하는 수령 독재체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거죠.
이런 흐름을 군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군부와 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이 연합한 반(反) 장성택 세력이 2013년 12월 8일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자’로 낙인찍고 닷새 뒤 그를 처형합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행정부는 조직지도부에 흡수되고, 군부의 무역사업 제한조치는 폐기됩니다.
북한 세습통치의 미래는
린츠에 따르면 민주주의로 체제전환이 가능하려면 지배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세력, 즉 독자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필수입니다. 문제는 이런 세력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 공산화 직전의 헝가리나 폴란드, 체코 등에서 볼 수 있듯 일정한 민주주의 경험 내지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바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 북한의 경우 이 단계를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죠. 이처럼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장 근대화로 이행한 술탄주의 체제는 마치 조선왕조와 같이 자생적 체제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일제의 침략으로 무너진 조선왕조처럼 불가항력의 외생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이상 자생적으로 체제전환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얘깁니다.
특히 다원주의가 확보되지 않는 술탄주의 체제에서는 정책실패에 대한 오류를 자체적으로 수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술탄(수령)에 대한 무오류성을 근거로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죠. 이에 따라 지도자의 정책 방향에 대해 체제 내부에서 이의를 제기하기가 극도로 힘든 구조가 됩니다.
실제로 1960년대 갑산파의 박금철, 이효순 등이 물질적 자극으로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과, 생산은 사회주의로 하되 관리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하는 경제정책을 제안했지만 갑산파 숙청과 더불어 폐기됩니다. 이는 1950, 60년대 성장일로를 걷던 북한경제가 점차 쇠퇴하는 분기점이 됐죠. 만약 갑산파의 경제개선 조치가 일정 부분 정책으로 수용됐다면 중공업 우선의 동원형 경제체제(스탈린식 경제체제)가 낳은 다양한 부작용(만성적인 ‘부족경제’ 등)이 어느 정도 완화됐을 겁니다.
북한의 술탄주의 체제에서 경제 시스템은 시장화와 복고주의(反 시장화) 노선의 반복을 겪고 있습니다. 과도한 시장화가 자칫 사회주의 당국가 체제의 이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기간 생존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가 진행된 이후 북한 당국은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로 나아갔지만, 결국 2009년 화폐개혁으로 과도한 시장화에 제동을 걸었죠.
특히 고난의 행군 당시 노동신문에는 차관 등 외부 지원에 의한 경제성장이나 시장 활성화 정책에 대해 ‘소극주의’ ‘패배주의’ ‘사대주의’로 비판하는 논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1998년 ‘강계 정신’을 내세우며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복고적인 대안으로 회귀하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결국 지배집단 안팎의 견제 세력이 말살된 술탄주의 북한 체제에서 자생적인 체제전환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심각한 체제위기를 맞아 어느 정도의 변화(예컨대 7.1 경제개선 조치)를 시도하더라도 ‘국가 안보’보다 ‘정권 안보’를 우선하는 체제에서는 보수적인 조치로 회귀하는 패턴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한의 체제 변화는 외생변수에 의해 촉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안보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최근 북한의 행태를 더욱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참고 문헌]
-Juan J. Linz & Alfred Stephan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1996·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장달중 등 <현대 북한학 강의>(2013년·사회평론)
-김일평 등 <북한체제의 수립과정>(1991년·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북한연구학회 <북한의 정치>(2006년·경인문화사)
-북한연구학회 <김정은 시대의 정치와 외교>(2014년·한울아카데미)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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