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 김대중’, 혐오와 증오의 시대에 그리워지는 DJ의 용서와 화해[MD칼럼]

곽명동 기자 2024. 2. 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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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 김대중'/명필름

[곽명동의 씨네톡]

민환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의 첫 시작은 흥미롭게 펼쳐진다. 대통령 퇴임 이후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DJ의 육성이 흘러 나오는데, 그는 나중에 커서 임금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술회한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임금이 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는 화가 났다고 털어 놓는다. DJ 특유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이 인터뷰는 2006년 진행됐다). 그것이 픽션이든 다큐멘터리든, 웃음과 유머로 시작한 영화가 끝날 즈음에 눈물로 마무리되면 관객은 그 작품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막연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1924년생 어린 아이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5.16, 유신, 12.12 군사반란, 광주 민주화 운동, 미국 망명과 가택 연금 등을 거치며 민주주의 파수꾼으로 거듭난다.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 당할 뻔한 아찔했던 순간부터 광주 민주화 운동 직후 신군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는 등 DJ는 모두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정권의 상상을 초월한 무자비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싸우느라 ‘투사’의 이미지로 각인됐지만, DJ는 누구보다 마음이 여렸다. 정치인 남편을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만 하다가 먼저 떠나간 아내를 그리워하고, 건강을 위해서라도 미국 망명길에 오르자는 이희호 여사의 간곡한 제안에 “거기서 뭐 먹고 사느냐”며 가장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감옥에서나 집안에서나 그는 꽃을 키우고 가꾸는 일을 인생 제일의 미덕으로 삼았다. 가택연금을 당해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감시 당하는 순간에는 꽃을 이용해 정보를 숨기는 기지를 발휘했다.

영화 장르에 비유하면, ‘길위에 김대중’은 서슬퍼런 군부독재 치하에서도 민주주의 목표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에 어울린다. 1973년 유신정권 시절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데 이어 1985년 미국 망명을 끝내고 귀국할 당시 살해 위협까지 받는 대목에선 ‘정치 스릴러’가 떠오른다. 언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감옥 안에서도 이희호 여사에게 사랑의 연서를 쉼없이 보내는 장면은 한 편의 ‘멜로’로 다가온다.

멜로, 스릴러, 대하드라마를 가로지르며 구축된 DJ정치의 위대함은 ‘용서와 화해’다. 그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투옥, 납치 등 생사를 오가는 탄압과 박해를 당했는데도 두 사람을 용서했다. 그는 보복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다. 올해는 DJ가 세상을 떠난지 15주년이 되는 해다. DJ가 떠난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퇴행을 거듭하는 중이다. ‘증오와 혐오’의 정치가 한국사회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DJ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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