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6일!] 뮌헨공항 이륙하자마자… 주축선수 잃은 명문구단의 비극

최재혁 기자 2024. 2. 6.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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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뮌헨 비행기 참사
1958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이 타고 있던 영국유럽항공 609편이 추락·폭발했다. 사진은 당시 사고 모습. /사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제공
1958년 2월6일 오후 3시4분. 당시 서독 뮌헨-리엠 공항에서 이륙한 영국유럽항공 609편이 20㎞가량 비행하다 추락해 폭발했다. 당시 비행기 안에는 '버스비 세대'로 불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선수들이 타고 있었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한 44명 중 2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사망자 중 8명은 맨유의 주축 선수들이었다.

당시 맨유는 유고슬라비아 클럽 츠르베나 즈베즈다와의 유러피안컵 토너먼트 원정 경기를 3-3 동점으로 마치고 맨체스터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총 44명을 태운 비행기는 재급유를 위해 뮌헨에 도착했다.

급유를 마친 비행기는 이륙을 두번 시도했으나 모두 엔진 결함으로 실패했다. 세번째 시도 만에 이륙에 성공해 천천히 하늘로 향하던 비행기는 얼마 안 가 급격히 흔들리더니 땅으로 추락했다. 비행기는 그대로 주인 없는 민가를 들이받았고 동시에 기름이 가득 채워진 트럭과 충돌했다.

트럭이 폭발하면서 비행기도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21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나머지 23명은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그중 2명은 끝내 숨졌다.



팀 주축 선수 8명 사망… 희생자엔 '특급 재능' 에드워즈도


사고로 '특급 재능'으로 불리던 던컨 에드워즈를 포함해 8명의 맨유 선수가 사망했다. 사진은 당시 맨유 선수단으로 참사 사망자들이 붉게 칠해진 모습. /사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제공
제프 벤트(25), 로저 번(28), 에디 콜맨(21), 마크 존슨(25), 데이비드 퍼그(22), 토미 테일러(26), 빌리 윌렌(22), 던컨 에드워즈(21). 당시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맨유 선수들이다. 사고에서 살아남은 조니 베리와 재키 블렌치플라워는 심각한 부상으로 은퇴를 결정했다. 이들은 유러피언컵 준준결승전을 치르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원정에 동행했던 만큼 모두 팀의 주축 선수였다.

특히 에드워즈는 팀 창단 이래 최고의 재능이라고 평가받으며 많은 이의 기대를 모았던 특급 유망주였다. 만 18세에 잉글랜드 대표로 선발돼 최연소 기록을 수립했고 21세엔 개인 최고 영예인 발롱도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매트 버스비 감독 지휘 아래 유럽 축구의 강호로서 승승장구하던 맨유는 사고 이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해 후보와 유소년 선수들로만 팀을 구성해 시즌을 마쳤으며 사고 이후 단 1경기만을 승리했다. 일각에서는 팀이 해체될 거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맨유는 사고에서 살아남은 버스비 감독과 함께 약 10년에 걸친 '팀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참사로부터 7년이 지난 1965년. 맨유는 보비 찰튼,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 등 '버스비의 아이들'을 앞세워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참사 7년만, 구단 통산 6번째 리그 우승이자 기나긴 암흑기의 끝을 보는 순간이었다.



진상 규명까지 10년 걸려… 원인은 활주로의 녹은 눈


사고 원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참사 직후 독일 공항 당국은 기장 제임스 타인이 제빙장치를 하지 않은 날개로 이륙하려 했다며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임스 타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목격자들의 진술과 독일 당국에서 제시한 증거 자료가 인정받지 못하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다.

1968년 공항 당국은 공항 활주로의 녹은 눈 때문에 항공기가 이륙하기 위해 필요한 속도를 내지 못해 사고가 났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나온 공식적인 발표였다.

사고에 대한 책임 소재가 잉글랜드 축구협회로도 향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리그 우승팀에게 유로피언컵 출전 기회를 제한했다. 자국 리그 중심주의에 따른 조치였지만 맨유는 세계 무대에서 겨뤄야 한다는 버스비 감독의 철칙에 따라 참가를 결정했다.

협회의 결정에 반기를 든 셈이어서 맨유는 일정상 큰 피해를 감수했다. 주말 자국 리그 경기를 치른 직후 주중에 있는 유러피언컵 원정길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당시만 해도 항공 여행은 매우 위험했지만 촉박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선 비행기 탑승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결과적으로 경기 일정에 대한 협회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사건의 발단이 됐고 협회는 많은 맨유 팬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참사 이후 66년 흘렀지만 추모 물결 여전


기념비, 액자, 추모비, 추도식 등 참사로부터 6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 구장에 걸린 추모 시계의 모습. /사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제공
1960년 2월25일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에는 3개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관중석 입구에는 사고로 사망한 서포터와 선수를 추모하는 액자가 걸렸고 기자석에는 함께 원정길에 동행했다 사망한 8명의 기자를 위한 청동 추모비가 세워졌다. 경기장에는 뮌헨 참사를 추모하는 시계가 있다. 뮌헨 참사와 희생자를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매년 2월6일이면 맨유 선수들과 팬들은 뮌헨 참사를 추모하는 추도식을 연다. 지난해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를 위해 뮌헨을 찾은 선수단은 경기 다음 날 뮌헨 참사 추모관으로 이동해 추모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에릭 텐 하흐 감독과 스티브 맥클라렌 수석코치를 필두로 선수단 대표인 브루노 페르난데스, 라스무스 호일룬 등은 헌화식에 참여했다. 1군 선수단뿐 아니라 19세 이하 팀 등 유소년 선수들도 같은 장소를 방문해 선배들을 추모했다.

최재혁 기자 choijaehyeok@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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