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신-구 정권 극한대결…‘후퇴한 민주주의’ 회복이 더 어렵다

신기섭 기자 2024. 2. 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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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공영 언론 개편 등 ‘속전속결’
옛 정권과 대통령, 조직적 저항으로 맞서
정국 혼란 속 “정치적·법적 위기 고조”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왼쪽)이 지난해 12월13일 도날트 투스크 새 총리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두 사람은 개혁을 둘러싸고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바르샤바/로이터 연합뉴스

폴란드 정치권이 법치주의 회복 등 과거 청산을 둘러싸고 2개월 이상 극한 대결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2월13일 출범한 친유럽연합(EU) 성향의 새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발 빠른 개혁 작업에 나서자, 권위주의적 색채를 띠었던 옛 정권이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중이다. 옛 정권 인사들이 사법부를 장악하고 있는데다가 법안 거부권이 있는 대통령까지 이들을 편들고 나서며, 새 정부가 개혁을 추진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한번 후퇴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게 민주주의를 처음 정착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07년 11월부터 2014년 9월까지 폴란드 총리를 지낸 친유럽연합 성향의 중도 정치인 도날트 투스크는 지난해 10월15일 총선에서 지난 8년에 걸친 법과정의당(PiS) 정부 아래서 후퇴한 민주주의 회복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가 이끄는 중도 정당인 시민연단(KO)은 총선에서 법과정의당(득표율 35.4%)에 이어 2위(30.7%)를 기록했다. 하지만 좌우를 아우르는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하며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전격적인 공영방송 개혁

투스크 총리는 새 정부 출범 직후 첫 개혁 과제로 공영 언론 개편을 추진했다. 공영 언론이 정권의 선전 기관으로 전락하고 자신을 비롯한 과거 야권 정치인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을 지속해왔다는 점을 개혁의 주요 이유로 제시했다.

공영 언론 개편 작업은 새 정부 출범 일주일 뒤인 지난해 12월20일 의회가 내놓은 공영 언론 공정성 회복 촉구 결의안이 신호탄이 됐다. 결의안 채택 직후 바르트워미에이 시엔키에비치 문화부 장관은 ‘폴란드 텔레비전’(TVP), ‘폴란드 라디오’(PR), 뉴스 통신사의 경영진과 이사진의 해임을 발표했다. 폴란드 텔레비전의 새 경영진은 취임 직후 24시간 뉴스 전문 채널의 방송을 전격 중단시켰다.

이 조처는 전임 정권 아래서 2016년 설립된 규제 기관인 국가미디어위원회(RMN)를 건너뛰고 이뤄졌다. 새 정부는 옛 정권 쪽 인사들이 장악한 이 위원회 설립 자체가 불법이라며 위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법과정의당 대표와 소속 의원들은 의회의 결의안 채택 직후 공영방송 본사에 들어가 밤샘 농성을 벌이며 저항했다. 국가미디어위원회도 공영방송 경영진 선출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다며 독자적으로 경영진을 선출하는 등 저항에 가세했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 역시 사흘 뒤인 23일 공영방송 지원금을 지난해 수준으로 책정한 정부 예산안을 거부하고 지원금을 전액 삭제한 독자 예산안을 내놓으며 제동을 걸었다. 대통령의 지원금 삭감 시도에 정부는 3개 매체의 청산 절차를 시작하겠다는 선언으로 맞섰다.

헌법재판소도 정부의 개혁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헌재는 지난달 18일 공영방송과 관련된 모든 결정은 방송법에 근거해야 한다며 정부의 경영진 해임과 법인 청산 절차가 무효라고 결정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헌재 재판관 한명이 불법적으로 선출된데다가 재판관들이 국가미디어위원회 설립에도 관여했다는 이유로 헌재 결정은 효력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유럽연합 법보다 폴란드 국내법이 우선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항의해 2021년 10월10일 수도 바르샤바의 중앙광장에서 친유럽연합 시위를 벌이고 있는 폴란드 국민들. 바르샤바/AFP 연합뉴스

사법부 장악 등으로 ‘개혁 저항 구조’ 구축

공영방송 개편 논란은 옛 정부가 만든 각종 입법과 당시 임명된 판사들로 구성된 사법부가 이제 개혁의 저항 세력이 됐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과정의당은 2015년 11월 집권하면서 1989년 소련 붕괴 이후 이룩한 자유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조처들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2017년 12월에는 법관 지명 권한이 있는 국가사법평의회(NCJ) 위원을 평의회에서 자체 선출하는 대신 하원에서 뽑도록 변경해 사법부에 대한 정치권의 입김을 강화했다. 이어 2019년 12월에는 대법원에 판사 징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에 대해 정부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침묵시키려는 조처라는 반발이 이어져 왔다.

유럽연합은 폴란드 정부의 이런 조처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며 유럽연합의 최고 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2019년 이후 폴란드의 사법 구조 개편이 위법이라는 결정을 잇따라 내놨다.

폴란드 정부는 이런 결정 수용을 모두 거부했다. 나아가 폴란드 헌법재판소도 2021년 7월과 10월 각각 유럽연합 조약이 폴란드 헌법에 합치하지 않으며 폴란드 국내법이 유럽연합 법에 우선한다는 결정 등을 잇따라 내놨다. 이런 결정은 ‘법률적 유럽연합 탈퇴’를 뜻할 정도로 심각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외신에선 이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Brexit)에 빗대 ‘폴렉시트’(Polexit)라 명명했다. 이에 대해 유럽연합은 폴란드에 대한 경제 회복 기금과 유럽연합 결속 기금 등 1120억유로(약 160조원) 지원을 거부하는 제재로 대응했다.

전임 정부는 사법부 장악에 그치지 않고 국가미디어위원회 등과 같은 조직 설립,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법제화 조처 등을 통해 권위주의적 통치 구조를 고착화했다. 폴란드 싱크탱크 ‘공무(공적 사무) 연구소’의 야체크 쿠하르치크 대표는 최근 시엔엔(CNN) 방송 인터뷰에서 “(법과정의당의) 철학은 법적 모호성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며 전임 정부가 남긴 이런 유산이 언론·사법 독립성 확보에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투스크 정부가 과거 청산을 위해 최대한 빠르고 단호하게 움직이고 있다며 “정치적으로나 법률적으로 가장 어려운 사안들을 가장 먼저 처리하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거부권 가진 대통령과 정면 대결

투스크 총리는 두다 대통령과의 정면 대결도 불사하고 있다. 폴란드 경찰은 지난달 9일 권력 남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대통령의 제안으로 대통령궁으로 피신했던 내무부 장차관 출신의 마리우시 카민스키 의원과 마치에이 봉시크 의원을 궁 안에 들어가 체포했다.

두 사람은 중앙반부패국(CBA) 국장과 차장으로 있던 2007년 연정 참여 정당인 ‘폴란드 자위당’을 무너뜨려 법과정의당에 흡수하려는 공작을 펼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두다 대통령은 2015년 두 사람을 사면했지만, 대법원은 2017년 형 확정 전에 사면이 이뤄졌다며 무효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은 정권 교체 뒤인 지난해 연말 다시 재판에 회부돼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두다 대통령은 두 의원이 체포된 지 2주 만인 지난달 23일 이들을 또다시 사면하는 무리수를 뒀다. 그는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한 거부권도 갖고 있는 만큼 마음만 먹으면 개혁을 얼마든지 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법과정의당 대표(왼쪽)와 이 당 지지자들이 지난해 12월20일 정부의 공영방송 개편에 항의해 폴란드 텔레비전 방송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바르샤바/AP 연합뉴스

향후 개혁 전망은 불투명

투스크 총리가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여당 지지율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정치 매체 폴리티코가 집계한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지난달 26일 현재 여당인 시민연단의 지지율은 31%로, 법과정의당(30%)을 사상 처음 앞섰다. 법과정의당의 지지율은 지난해 10월 총선 당시보다 5%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공무 연구소’의 쿠하르치크 대표는 “많은 사람은 공영방송 개혁이 이렇게 빨리 가능할 걸로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전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디디에 렝데르 법무 담당 집행위원은 지난달 19일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법치주의 회복 노력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투스크 정부에 힘을 실어줬다. 그는 지급이 중단됐던 경제 회복 기금 중 70억유로(약 10조1천억원) 지급 절차가 곧 시작되기를 기대한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새 정부의 이후 개혁 계획이 뭔지는 불확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탠리 빌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폴란드학)는 시엔엔 인터뷰에서 투스크 정부가 초기에 개혁을 너무 빠르고 너무 과하게 추진한 감이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제도를 개선할 방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상태는 즉흥적인 예외 상황”이라며 “폴란드에서 진정한 정치적·법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역사학자 티머시 가턴 애시는 최근 영국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현재 폴란드의 혼란이 내부 갈등 탓이라는 점에서 “1989년 소련 붕괴 뒤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것보다 지금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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