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덩이 공사비’에 재건축 단지는 분쟁 중
물가 상승에 건설사들 증액 요구, 조합은 새 시공사 찾기 어려워 수용
당초 총액입찰제 계약에 포함된 ‘착공 후 물가변동 배제’ 특약이 불씨
부동산원에 비용 검증 하지만 강제력 없어…정부 ‘표준계약서’ 유도
연초부터 정부가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실질적으로 사업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 결국은 ‘돈’이 문제다. 최근 2~3년간 치솟은 건설공사비를 누가 부담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조합과 시행사 간 갈등이 빚어지고 있고, 이는 공사 지연으로 이어진다. 시공계약 해지는 물론 공사 중단이나 법정 소송으로 비화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양측 입장이 쉽게 좁혀지지 못하는 배경엔, 모호하게 체결된 도급계약이 있다.
■공사비 갈등의 배경엔 ‘총액입찰제’
DL이앤씨는 최근 준공한 청천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e편한세상부평그랑힐스) 조합과 신탁사를 상대로 ‘공사대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자체 산정 결과 2020년 7월 착공 때보다 공사비가 1645억원이나 늘어났으니, 이를 지급해달라는 취지다. 양측은 ‘착공 이후 물가변동은 반영하지 않는다’는 특약을 두고 충돌했다. 조합은 도급계약서에 이러한 특약이 명시되어 있는 만큼 물가변동분을 공사비에 반영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시공사는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예상하기 어려운’ 사유로 인해 공사비가 늘었으니 기계적으로 이 특약을 적용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맞섰다.
이 사업장에서만 벌어지는 갈등이 아니다. 대부분 정비사업 도급계약은 ‘총액입찰공사’ 방식으로 체결된 뒤 ‘착공 이후 물가변동 배제’ 특약을 포함하고 있다. 설계변경이 잦은 정비사업 특성상, 세부내역을 하나하나 정하기보다 공사비 총액 수준만 합의해 입찰과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자는 취지다. 원자재값이나 인건비가 완만히 오를 땐 시공사도 예상 물가상승폭을 감안해 공사비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조항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KICT)이 발표하는 주거용 건축물 건설공사비 지수(12월 기준)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전년 대비 2.7~4.3%의 상승률을 유지했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2021년부터다. 2021년 12월 주거용 건축물 건설공사비 지수는 152.47로, 전년 동월 대비 13.5% 올랐다. 2022년은 6.9%, 2023년은 3.3%가 각각 올랐다.
■건설사 증액 요구에 ‘을’이 된 조합
결국 건설사들은 ‘계약 위반’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고 나섰다. 손해를 보고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송파구 잠실진주아파트는 2018년 최초 도급계약 금액이 3.3㎡당 510만원이었으나,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이를 889만원으로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 인상폭은 무려 74%에 달한다. 지난해 12월 공사계약변경 약정 체결 총회에서 반대표(787표)가 찬성표(555표)보다 많이 나오면서, 상반기 중 한국부동산원에 공사비 검증을 받기로 했다. 그나마 ‘협상력’이 있는 강남권 조합은 사정이 낫다. 대다수 조합들은 시공계약을 해지한다 해도 새로운 시공사를 찾기가 어렵다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건설사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남시 산성구역 재개발조합은 2020년 3.3㎡당 429만원에 도급계약을 맺었지만, 지난해 7월 이를 629만원으로 증액하기로 합의했다. 시공단(GS건설·대우건설·SK에코플랜트)과의 계약 해지를 의결했다가 재선정 공고에 입찰한 시공사가 없자 재협상에 나섰다. 북아현2구역 재개발조합도 공사비를 358만원에서 859만원(140%)으로 올려달라는 시공단(삼성물산·대림산업) 요구에 시공계약 해지를 추진했다가 748만원에 최종 합의했다.
조합의 협상력이 떨어지는 배경에는 건설사와 조합 사이의 ‘정보 격차’도 존재한다. 정비사업 비전문가인 조합은 전문가인 건설사의 공사비 증액 요구가 타당한지 검증하기 어렵다.
조승연 HnC 대표(서울시 건축위원회 위원)는 “애초에 총액입찰제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건설사들이 공종별 공사비 인상 근거를 세부적으로 담은 자료를 잘 내놓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며 “자료를 받아낸다 해도 이러한 인상 요구가 타당한지 검증할 전문 인력이 국내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부동산원 공사비 검증도 한계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부동산원에 공사비 검증을 요청하는 단지도 늘고 있다. 부동산원에 공사비 검증을 신청한 건수는 제도가 도입된 2019년 3건에서 2020년 13건, 2021년 22건, 2022년 32건, 2023년 30건으로 점차 증가했다.
하지만 부동산원도 공사비 증액 요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물가변동이나 금융비용 등은 검증 항목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아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동산원은 서초구 신반포4지구 재건축조합(메이플자이) 시공사인 GS건설이 조합에 요구한 증액분 4700억원 가운데 3180억원을 검증한 뒤, 1000억원가량 감액한 2186억원을 제안했다. 공사비 증액 요구에 핵심이 되는 물가변동이나 금융비용(1800억원) 등은 검증하지 않았다.
부동산원 관계자는 “물가·금융비용 상승에 대한 기준점을 두고 양측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아 검증 신청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안다”고 했다.
부동산원이 공사비 검증 결과를 내놓는다 해도, 시공사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를 강제할 수단은 없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비사업 도급계약은 민간 주체 사이의 계약인 만큼 정부 중재안에 강제력을 두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했다.
정부는 ‘정비사업 표준계약서’ 개정·배포라는 차선책을 내놨다. 사업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계약서 작성 단계에 공사비 총액뿐 아니라 세부산출내역서까지 첨부하도록 공개한 것이 핵심이다.
이윤홍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겸임교수는 “세부산출내역서를 제출토록 한 것은 타당성 검토의 초기 자료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이라면서도 “인건비 항목도 반영하고, 설계변경 타당성을 사전에 검증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등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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