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공백’ 근대사 복원의 첫 단추는[특별기고]
근대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
얼마 전 경복궁 월대가 복원됐다. 월대를 두고 “궁궐 안과 밖을 이어주는 매개 공간”, “임금과 백성을 이어주던 공간”이라며 다들 ‘복원’ 또는 ‘재현’의 의미를 강조했다. 하지만 월대는 중국 사신을 맞거나 임금이 과거를 보는 유생을 지켜보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하사하던 권위주의, 전근대성, 봉건성, 비민주성, 비인간성의 조선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나마 월대의 복원 또는 재현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일제강점기 훼손된 조선의 상징을 회복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지금껏 우리 근대사에서 조선은 ‘회복’하고 일제는 ‘작파’의 대상이었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 ‘중앙청’ 앞에 광화문을 중건(1968)하거나, 구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철거(1995~1996)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다 갑자기 2000년대 들어 개항(1876) 이후 서양인과 일본이 세운 ‘근대건축물’ 보존을 시작했다. 문화재청은 ‘근대건축물’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부는 ‘근대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을 시행해 군산, 목포, 부산, 대구, 포항 등에 산재한 적산가옥 등 일제강점기 자잘한 건물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까지 동원해 ‘근대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보존 및 회복시켰다. 이렇게 우리는 광복 이후 일제강점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보존’과 당시의 치욕을 떨치려는 ‘작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왔다. 역사를 대하는 이런 이중성은 ‘경복궁 복원사업’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근대사의 아픈 고리인 고종과 대원군이 중건 공사를 완료한 1888년의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일제나 서구의 건축 양식이 한국건축에 녹아들던 시기였다.
그런데 근대에 대해 합의된 일관적인 정의가 없는 상황에서 국치와 일제강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러한 오락가락 현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속은 쓰리지만, 기억과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근대에 대한 분명한 성찰은 필요하다. 특히 당시의 시대정신과 미감, 미학을 담아낸 근대미술품은 마땅히 보존돼야 하고, 국가와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대미술품의 조사연구는 더욱 강화해 우리의 ‘근대’를 규정해야 한다. 이런 우왕좌왕의 배경에는 번듯한 근대미술관 하나 없는 대한민국의 실상이 있다. 근대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의 ‘부속품’이나 ‘하위 장르’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광화문 거리는 광복한 지 80주년이 다 돼가도록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을 표상하는 그 어떤 상징물도 없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격정적이며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근대’가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현대는 물론 현대미술 또한 뿌리 없는 나무처럼 어정쩡하고 기이한 형태로 오늘을 상실한 채 굴러가고 있다.
문화가 빠진 질곡의 근대사?
근대를 규정하는 정부나 국민의 시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정치권은 진영이나 정파에 따라 멋대로 근대를 규정하고, 문화예술인들은 이에 맞장구치며 확대 재생산을 거듭하는 바람에 대한민국 근대사는 점점 더 왜곡돼 가고 있다. 이는 1차적으로 광복 후 우리의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규명 없이, 극복을 위한 부정 또는 의도적 외면으로 일관한 탓이다. 사실 근대란 인류사에서 왕정을 극복한 후 전개된 근대사회 시기로 개인을 존중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지향한다. 또한 근대는 봉건영주 또는 귀족의 예속민으로 토지에 묶여 있던 인간이 여기서 벗어나 자유로운 노동자로 재탄생하는 국민국가의 성립을 뜻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오늘날 문명국가의 시작인 근대와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을 도외시하는 사례가 없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근대 역사학은 19세기 국민국가라는 특별한 형태의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가들은 자민족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민족적·지역적 테마를 자국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다룸으로써 국민국가의 역사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때 국가라는 추상적 공동체의 객관적 정체성을 도출하고자 등장한 게 바로 근대 미술관이다. 유럽의 근대, 독립 후 미국 도시들이 앞다퉈 미술관을 설립한 것도, 문화를 공유해 공감대를 이루고 이를 통해 국민을 통합하는 정치적인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45년 광복 후 총독부박물관과 총독부미술관을 일제로부터 돌려받아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으로 개편한 바 있다. 하지만 경복궁미술관이라 불렸던 국립미술관은 1969년 5월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됐고, 같은 해 10월 새롭게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근대미술’을 사실상 버렸다. 근대를 논의할 공간은 물론 시간마저 잃어버린 셈이다. 대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아시아·아프리카·남미 국가들은 국립미술관 등의 건립을 통해 이견이 존재하는 근대사를 문화적이며 예술적인 관점에서 정리하며, 나아가 정치와 사회적인 문제까지 객관적 합의를 했다. 피식민 시대 생산된 문화유산, 미술작품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문화적 자산, 국가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이로써 식민시대의 민족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근대 문화유산인 미술품을 다루는 국립미술관을 국립박물관에 넘겨주고, 그것도 모자라 5개월 뒤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근대는 생략한 채 바로 현대로 와버렸다. 이로 인해 질곡의 근대사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한국 근대사 구하기
우리가 질곡으로 빠트린 한국 근대사는 선진 대한민국의 근대(modern)와 현대(contemporary)를 아우르는 상징적 시공간이어야 할 광화문광장을 문화평론가 최범의 지적처럼 오직 봉건왕조 시대의 ‘조선’으로만 채워진 기형적 모습으로 만들어버렸다. 현재 우리 근현대사는 재현된 조선에 치이고, 일제강점기에 의해 다시 한 번 강점당한 상태다. 우리의 근대는 여전히 미혹 속에 존재한다. 아픈 과거를 굳이 기억하기 싫은 탓이다. 그래서 논의조차 꺼리니 국민적으로 근대에 대한 합의된 해석이나 평가가 있을 리 없다. 이런 현실은 한국사의 ‘공백’이 되어 정치적 이해에 따른 이념적·정파적·자의적인 해석과 평가를 가능하게 만들면서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논쟁적 소모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민주 공화제의 국민국가, 근대국가의 성립이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근대사는 사라지고 이전투구의 상처뿐인 근대만 남았다.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친일미술론’은 이런 민망한 상황을 상징한다. 근대를 정치적·민족적 입장 또는 정파적 입장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바람에 생긴 현상이다. 일제 청산을 위한 친일 미술 극복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일제강점기 항일과 반일, 민족 지사 화가들의 역사를 성찰하고 행적을 공부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을 주장하는 까닭이다.
‘국치’와 ‘일제강점 35년’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이유는 없다. 과거의 상처가 깊을수록 오늘 우리의 성공이 그만큼 더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역경을 딛고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을 일군 자부심의 배가를 위해서도 우리 근대는 복원돼야 한다. 그 복원의 첫 단추는 바로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이다.
정준모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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