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사산 전 아팠는데 일했다” 81%…산재 인정은 10여년간 10명뿐

오세진 기자 2024. 2. 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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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
유산·사산 여성 노동자 859명 설문조사
게티이미지뱅크

“진짜, 회사에서 너무 눈치가 보여요. 그런 휴가(유·사산 휴가)를 쓰고 싶어도 자꾸 눈치가 보여가지고…”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

해마다 5만여명의 직장여성이 유산·사산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산 또는 사산할 당시 “몸이 아파도 참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 여성 노동자가 10명 중 8명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임신한 여성 노동자에게 유해한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최근 펴낸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환경 보장 연구: 유산·사산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5일 살펴보니, 여성 노동자 80.8%가 유·사산 당시 “임신으로 몸이 아팠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참고 일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를 쓴 연구진은 2015년부터 지난해 7월 사이 유산·사산을 경험한 여성 노동자 859명(유산 94%)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들은 통증을 참고 일한 이유로 ‘업무 특성상 그 업무를 내가 꼭 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대체 인력이 없어서’(64.4%) 라고 가장 많이 꼽았다. ‘휴가 사용 시 눈치(회사 동료 또는 상사의 업무 가중)가 보이거나,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 때문에’ 그랬다는 응답(24.8%)과 ‘나의 개인적 성향’(10.8%) 때문이라는 답변이 그 뒤를 이었다.

유산·사산 당시 업무가 임신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여기는 응답자일수록 노동시간이 길었다. ‘업무가 임신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답한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9.38시간으로 가장 길었고,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의 경우 하루 평균 8.80시간으로 조사됐다.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 이들은 8.12시간,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이들의 경우 평균 7.55시간을 일했다. 마찬가지로 ‘유산·사산이 업무와 연관성이 있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밝힌 응답자의 경우도,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9.42시간에 달했다.

설문에 응한 한 사무직 노동자는 연구진과의 면접에서 “(유산·사산 당시)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6시30분까지 (10시간 가까이) 근무했고, 토요일에도 낮 2시30분까지 일했다. 점심시간도 20분만 잡고 바로 일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응답자 중 ‘원할 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고 답한 비율은 38.4%, ‘업무량을 조절할 수 있었다’고 밝힌 비율은 30.7%에 불과했다. 또 응답자의 76.8%가 유·사산 당시 ‘감정을 숨기고 일해야 했다’고 말했고, 70.4%는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유산·사산은 모든 일터에서 발생하지만 고용이 불안정한 경우, 일터 내 유해인자(작업 자세, 업무량, 중량물 취급, 화학물질, 소음·진동 등)에 노출되는 빈도가 많은 경우, 감정노동 등 스트레스가 심한 일터에서 업무를 하는 노동자의 경우, 유산·사산에 상대적으로 취약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특히 여성 노동자 중에 근로기준법에서 보장하는 유산·사산 휴가를 사용하지 못하고 개인 연차를 사용한 경우도 상당수 있었는데, 회사 쪽에서 연차 사용을 권유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현재 우리나라 일터에선 유산·사산(조산 포함)이 ‘산업재해’(업무상 질병)라는 인식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매년 5만여명의 직장여성이 유산이나 사산, 조산을 경험하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유산 등을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사람은 10명에 그쳤다.

연구진은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유산·사산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기 위한 정부의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가 사업장을 상대로 여성 노동자의 유산 등을 예방하기 위한 산업안전보건교육을 강화하고, 사용자의 임신부 보호 의무 위반 여부 확인을 위한 근로감독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1일 2시간)을 임신 전 기간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현재는 임신 후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 여성 노동자만 근로시간 단축 신청을 할 수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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