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서 따낸 원정 월드컵 첫 16강… 붉은악마·선수들 염원 담긴 귀한 공

채민기 기자 2024. 2.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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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39] 허정무 前 축구대표팀 감독

“32년만에 본선 무대를 밟게 됐으니 국민도 매스컴도 온통 월드컵 얘기였죠.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랬죠? 축구는 내셔널리즘이 참 강한 스포츠입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 사인을 모은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를 들고 선 허정무 전 감독. 그는 "(16강전에서) 우루과이 상대로 경기를 주도하고도 이기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허정무(69)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된 순간을 회상하며 말했다. 한국은 1985년 11월 열린 최종 예선 2차전에서 허 전 감독의 결승골로 일본을 1대0으로 이기고 본선 티켓을 따냈다. 이틀 뒤 ‘스포츠 내셔널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가 당시 열띤 분위기를 보여준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여와 야, 그리고 콩쥐와 팥쥐, 흥부와 놀부, 고양이와 쥐까지도 이 시간만은 한마음이 되어 열광했던 것이다.”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 본격 진출한 순간이었다. 한국은 그때부터 내리 10차례 월드컵 본선에 나갔고 그중 3번은 토너먼트까지 올라갔다. 한국 축구의 도전사(史)는 전쟁 상처를 딛고 아시아를 넘어 G7(주요 7국) 반열에 올라선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그 현장에 있었던 허 전 감독은 “축구만큼 국민들 마음을 슬프게도 하고 즐겁게도 한 스포츠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선수단·코칭스태프 얼굴을 담은 액자. /이태경 기자

◇'16강’ 이룬 첫 한국인 감독

대한민국은 1954년 아시아 독립국가 최초로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인이 우리 땅에 발을 들일 수 없다”고 해서 일본과 예선 홈앤드어웨이 2경기를 모두 적진에서 치렀다는 일화가 있다.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선수단 22명을 스위스행 비행기에 다 함께 태울 형편조차 되지 못했다. 1·2진으로 나뉜 한국 선수단이 늦게 도착해 본선 경기가 연기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조별 리그 결과는 두 경기에서 득점 없이 16실점. 1958년 스웨덴 월드컵 때는 대한축구협회가 참가 신청서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예선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1956·1960년 아시안컵 우승을 필두로 한국은 1960~1980년대 박스컵·메르데카컵·킹스컵 같은 아시아권 대회를 여러 차례 제패했다. 그러나 월드컵은 번번이 본선 문턱에서 미끄러졌다. 1954년 이후 7전8기 끝에 진출한 1986년 멕시코에선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허 전 감독은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면서 “아시아에서만 노느라 세계 축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했다. 그는 조별 리그 첫 경기 상대였던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를 막아서는 유명한 사진을 스크랩북에 보관하고 있다. 제목은 ‘네가 마라도나냐’. 허 전 감독은 “공을 걷어낸 상황이었고 경고도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 사진은 한국과 세계의 격차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았다. “거칠게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라도나는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허정무와 마라도나의 대결 장면을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조선일보 DB

개최국이었던 2002년 월드컵에서 본선 첫 승리,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원정 첫 승리를 거뒀다. 2010년 남아공에서 처음으로 원정 16강에 진출했다. 그때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허 전 감독은 “첫 경기에서 그리스를 못 이기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순간적 움직임이 떨어지는 그리스를 상대로 역습과 세트피스에 승패를 거는 전략이 적중했다”고 말했다.

원정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두고 조별 리그를 통과한 한국인 감독은 그가 최초다. 당시 대표팀 멤버들 사인을 모은 공인구와 얼굴 스케치를 담은 액자가 책장에 있었다. 사인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허 전 감독이 말했다. “정해성 수석 코치, 주장이었던 박지성…. 이 안에 다 있습니다. 그때 대표팀의 간절했던 마음이 전부 담겨 있으니 정말 귀한 공이죠.”

◇축구 입문 위해 중학교 두 번 다녀

허 전 감독은 지금도 1969년 1월 17일을 기억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못한 그가 먼 친척뻘인 전 축구 국가대표 허윤정(1936~2022)의 주선으로 서울 중동중 축구부 숙소에 도착한 날이다. 중동중 2학년으로 다시 들어간 그는 영등포공고 2학년 때 청소년 대표로 선발됐고 연세대 1학년이었던 1974년 처음 국가 대표가 됐다. “청룡팀이라고 했던 국가 대표팀에서 이회택 선배가 부상으로 빠지고 제가 선발됐어요. 1975년부터는 대표팀이 화랑팀으로 개편되고 세대교체가 이뤄졌죠.”

팬이 만들어 보내준 스크랩북 속 1970년대 후반 대표팀 시절의 사진. /이태경 기자

서재에 오래된 신문 기사와 책, 각종 기념품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허 전 감독은 “아내가 수고해준 덕에 모을 수 있었다”고 했다. 1980년 결혼하고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까지 허정무의 1970년대는 한 팬이 만들어준 스크랩북에 기록돼 있다. “연세대 시절부터 제가 나온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보내주신 팬이 있어요. 팬레터에 답장했더니 스크랩을 보내왔는데 그 정성이 정말 고마운 일이죠.”

빨간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스크랩 속 사진에 ‘서독 스카우트설의 화랑 허정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차범근에 이어 분데스리가 진출설이 나올 때였다. 허정무는 독일이 아닌 네덜란드로 갔고 PSV아인트호번에 입단했다. “뉴욕 코스모스 시절에 한국에 왔던 베켄바우어, 월드컵에서 만난 마라도나, 네덜란드에서 대결했던 요한 크루이프처럼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뛰어본 것이 축구 선수로서 대단한 영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다들 고인이 됐네요.”

◇한국과 세계 이어 준 축구

허 전 감독을 만난 날은 카타르 아시안컵 16강전 하루 전이었다. 그는 “역대 대표팀 중에서 지금이 가장 강하다”면서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차범근 감독과 제가 유럽에 갈 땐 군필이어야 해외에 진출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나오면서 한국 축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어려서 해외에 나가는 선수가 많아졌고 국내에서도 프로팀이 유스(청소년)를 의무적으로 육성하게 하는 등 시스템이 개선되면서 한국 축구의 수준이 올라간 거죠.”

포항제철 감독 시절 만난 박태준 전 POSCO 회장과 겪은 일화도 소개했다. “일찌감치 포항과 광양에 축구 전용 구장을 만들고 팀도 둘(포항 스틸러스와 전남 드래곤즈)이나 창단할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여쭤보니 ‘나는 야구도 좋아해. 하지만 세계로 나가려면 축구를 해야 돼’라고 하시더군요. 한국 최초로 브라질에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고 그걸 발판 삼아 광물을 수입하는 길을 뚫어 사업에 활용한 곳이 포항이었어요.”

특정 국가나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서 보편적 인기를 누리는 축구를 세계와 한국을 잇는 다리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허 전 감독은 “손흥민 같은 선수들은 외교관 못지않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한다”면서 “앞으로 제2, 제3의 손흥민 같은 선수가 계속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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