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처럼 그리워하라”…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 열풍[인사이드&인사이트]
메이드 인 코리아 ‘기생충’ 넘어… ‘성난 사람들’ 이민 1.5세대 시선
美 주류 사회 한국인 편견 넘어… ‘패스트 라이브즈’로 향수 공감
할리우드 ‘정치적 올바름’ 분위기… ‘오징어게임’ ‘BTS’ 인기도 한몫
출판-문학계에도 영향… 소수자 관점 공유해 큰 파급력
최근 한국인 이민자들의 정체성이 담긴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들이 문화계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그동안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변방에 있던 한국 콘텐츠가 주목받으며 한국 이민자들에 대한 시선도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서러움을 인종차별로 풀어내는 것을 넘어 그리움, 분노 같은 정서로 풀어내는 것도 특징이다. 한국적 특수성을 내세우며 색다름을 강조하던 과거를 넘어 누구라도 이해할 만한 보편적 감수성을 건드리며 공감대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인 이민자의 삶 입체적으로 그려
최근 해외에서 인정받는 한국 관련 콘텐츠는 이민 1.5세대 혹은 2세대가 현지에서 만든 작품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처럼 토종 한국 콘텐츠가 부상하면서 한국계 외국인들이 제작한 콘텐츠도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의 각본을 쓰고 연출, 제작을 맡은 이성진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9개월 때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 1.5세대다. 이 감독은 10대 시절 한국식 이름에 부끄러움을 느껴 ‘소니(Sonny)’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꿀 정도로 정체성 갈등을 겪었다.
이런 그의 고민을 반영하듯 ‘성난 사람들’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이민자들의 분노를 포착했다. 특히 극 중 한국계 ‘대니’(스티븐 연)가 설렁탕과 라면을 즐기고, “교회에서 좋은 한국 여자를 만나라”는 엄마의 성화를 듣는 등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남녀가 20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도 12세 때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셀린 송 감독이 연출했다. 송 감독은 데뷔작인 이 영화로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르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뒀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고향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송 감독은 아카데미 후보 지명 후 인터뷰에서 “나는 캐나다인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성난 사람들’과 ‘패스트 라이브즈’ 모두 한국계 미국인 혹은 캐나다인의 시각에서 한국 이민자의 정체성을 담아낸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최근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는 백인 주류 사회의 한국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존에 한국계 배우들은 무술을 잘하는 과묵한 인물이나 소심한 너드(nerd·괴짜), 돈만 밝히는 수전노와 같은 캐릭터로 주로 소비돼 왔다. 배우 이병헌이 영화 ‘지.아이.조’(2009년)에서 선악을 따지지 않고 주어진 임무만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용병을 연기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역사적 맥락에서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가난에 쫓겨 미국으로 온 한국 이민자 1세대를 다룬 영화 ‘미나리’나 재일 한인 교포들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 ‘파친코’가 대표적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그린 작품과 달리 한국계 감독이 찍고, 한국계 배우가 연기한 작품은 한국적 감정을 주체적으로 그린다”고 평가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성난 사람들’과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양 창작자들이 한국인에게 지닌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 할리우드 ‘다양성’ 추구도 영향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의 성공에는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국 내 분위기도 한몫했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 성별 등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2021년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영화 ‘미나리’가 한국어로 극이 전개된다는 이유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자 아시아계 작품 홀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미국 아카데미는 2022년 남우조연상에 영화 ‘코다’의 미국 농아인 배우 트로이 코처를, 여우조연상에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성소수자이자 라틴계 흑인 배우인 아리아나 더보즈를 선정했다. 아카데미는 올 3월부터는 최고상인 작품상 수상 자격에 ‘다양성’ 기준을 추가했다. 영화 내용이나 제작, 마케팅 방식 등 영화 제작 전반에 걸쳐 인종·성별 다양성을 고려해야 작품상 후보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송 감독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것도 다양성 추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카데미가 2023년 뮤지컬·코미디 영화부문 여우주연상을 중국인 이민자를 다룬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말레이시아 화교 배우 양쯔충(양자경)에게 수여했다. 미국 영화계에서 다양성은 필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한국 콘텐츠가 흥행하면서 인지도와 친밀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거론된다. 2020년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K팝 그룹이 미국 빌보드를 휩쓴 것에 더해 대중문화적 파급력이 높아졌다. 이혁상 디아스포라영화제 프로그래머는 “한국이 수년간 쌓아온 콘텐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주목받고 있다”며 “특히 세계적으로 인종, 나이, 성별, 장애 등 문화 다양성의 기조가 강조된 점도 성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편적인 주제 의식으로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恨)’과 같은 한국적 정서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분노, 향수 등 세계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친코’를 연출한 저스틴 전 감독은 지난해 10월 부산 해운대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코리안 아메리칸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 기자간담회에서 “이민자 이야기는 각자의 섬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나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며 “‘성난 사람들’이 대단한 건 이민자의 삶을 통해 현대인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도 주목
코리안 디아스포라 열풍은 출판, 문학계에도 불고 있다. 특히 그동안 주로 작품성으로만 인정받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이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전방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7세 때 서울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이 쓴 장편소설 ‘파친코’다. 2022년 애플TV플러스에서 공개를 시작한 동명의 드라마가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소설이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북스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70위에 올랐다.
‘파친코’의 성공 이후 연달아 영미 문학계에선 다양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품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계 미국 작가 조지프 한(한국명 한요셉)의 장편소설 ‘핵가족’(위즈덤하우스)은 2022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이 작품은 미국 이민 2세대인 주인공이 6·25전쟁을 겪은 할아버지의 흔적을 따라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계 미국 작가 미셸 조너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엄마가 해주던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문학동네)는 2021년 미국에서 출간된 뒤 아마존북스 아시안&아메리칸 분야 1위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가 이민자처럼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빈곤층이나 성소수자 등의 관점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크다고 분석한다. 이형권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국제한인문학회장)는 “다수자와는 다른 소수자만의 생각과 느낌을 살려낼 때 코리안 디아스포라 콘텐츠는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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