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졸업장 품고 마지막 졸업식…“등교는 행복이었죠”
1972년 직공 야학으로 출발
이사장 사망 후 인수자 없어
6070, 못 배운 한 풀려 입학
“배우니 삶의 먹구름 사라져”
대학까지 학업 이어가기도
“빨리 와, 사진 찍게. 꽃도 들고 와. 자, 하나둘, 찍습니다 멸~치.”
5일 오전 11시 서울 강서구 대안학교 성지중고등학교의 한 교실. 올해 졸업생 10여명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칠판 앞에 섰다. 딸이 준 꽃다발을 든 장모씨(74)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장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가리봉동 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했다. 남들과 함께 공부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은 장씨는 4년 전 성지중고 문을 두드렸다. 그는 “수학이 너무 어려워 포기할 뻔했는데 그래도 끝까지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아 뜻을 이뤘다”고 했다.
3학년 2반 맏언니 안상숙씨(78)는 “‘여자는 음식 잘하고, 바느질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더라”면서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해보니까 생소한 걸 배워가는 재미를 알게 됐다”고 했다.
22년간 이곳 교편을 잡은 국어교사 정모씨(49)가 졸업생 이름을 부르며 졸업장을 나눠줬다. 정씨가 “졸업식이라고 하니까 끝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카카오톡 있지 않나. 계속 안부 전하면서 지내자”고 하자 졸업생들은 “자주 연락드리겠다. 건강하시라”고 맞장구를 쳤다. 반 회장을 맡았던 강영순씨(75)는 “이 나이가 되니 배우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아침 먹고, 가방 들고 이곳에 나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고 했다.
이날 대안학교 성지중고 교실에서 마지막 졸업식이 열렸다. 올해 졸업식을 끝으로 학교는 문을 닫는다. 성지중고는 1972년 구두닦이 등 직공을 가르치는 야학으로 문을 열었다. 한때는 전교생이 1800명에 이를 정도로 붐볐지만 폐교를 앞둔 올해 졸업생은 180명 남짓이다.
2021년 학교 설립자인 김한태 이사장이 사망한 뒤 학교 법인화에 실패한 것이 폐교 이유다. 학교 관계자들은 지난 2~3년간 곳곳에 학교 인수 의사를 타진했으나 재단 출연금·건물 유지 및 보수 등 문제에 막혀 인수자를 찾지 못했다.
만학도들은 배움의 한을 풀고자 성지중고를 찾았다. 입학생들은 강서구·양천구 등 인근 거주자가 주를 이루지만 경기 부천·일산 등에서 오는 경우도 있었다.
폐교 결정 이후에도 여전히 학교로 입학 문의 전화가 온다고 한다. 박진철 성지중고 교감은 “전화 입학 문의가 하루에도 여러 통 들어오는데 학교로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학교를 거쳐간 만학도들은 학교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털어놨다. 성지중고 동창회장 한미숙씨(61)는 “내 의지가 아닌 가정형편 때문에 못 배운 것에 마음속 쓰라림이 있었다. 다른 애들 다니는 학교를 나는 못 간다고 생각하면 서러웠다”면서 “졸업을 하니 삶에 끼었던 먹구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학교는 ‘교육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졸업 후 방송통신대 등에서 배움을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04년 졸업생 김성진씨(70)는 단국대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을 마쳤다.
학교생활은 사람 간 연대를 확인하는 계기도 됐다. 2012년 졸업생 김국화씨(69)는 1학년 때 사정이 생겨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다. 당시 김씨를 붙잡은 건 영어교사였다. 김씨는 “영어 선생님이 ‘시작을 용기 내서 하지 않았냐. 지금 포기하면 다시 입학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붙잡아 결국 졸업했다”고 했다. 김씨는 졸업생 13명과 동창 모임을 꾸려 두 달에 한 번씩 만난다.
졸업식은 30분 만인 오전 11시30분 끝났다. 만학도들은 각자 졸업장을 품에 안고 교실 밖으로 나섰다. 졸업생 뒤로 ‘앞으로 새로운 출발을 응원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비바람에 휘날렸다. 사진을 찍은 졸업생들은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흩어졌다.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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