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명 사망한 ‘최악의 재앙’…11만명 일년째 컨테이너서 못 벗어나 [르포]

김제관 기자(reteq@mk.co.kr) 2024. 2. 5.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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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지진 1년…피해지역 3곳 가보니]
도심 곳곳에 뼈대만 남은 건물 건물 수두룩
이재민들 아직도 집 없이 컨테이너서 살아
정부 건설 공동주택 이르면 이달말 입주 시작
올해 총 20만채 공급…피해자 중 추첨 예정

지난해 2월 6일 튀르키예 남부를 중심으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해 무려 5만여 명이 사망했다. 이 지진은 ‘21세기 최악의 자연재해’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매일경제가 튀르키예 대지진 1년을 맞아 3~5일(현지시간) 7개국 50명의 국제기자단과 함께 가장 큰 지진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인 말라티아주(州)와 아디야만주, 카라만마라슈주를 찾았다. 1년이 지났음에도 곳곳에 참사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생존자들의 정신적 고통도 여전한 듯 보였다.

지진의 상처를 애써 가리려는 노력은 역력했지만 곳곳에 남겨진 대재난의 흔적들은 감추기엔 너무 크고 깊었다.

‘집’ 먼저 짓느라 상점은 컨테이너 영업
한 푼이라도 싸게 사려 긴 줄 늘어서
지난해 2월 21세기 최악의 지진피해를 입은 튀르키예의 동부 말라티아시 시내의 한 건물. 지난 3일(현지시간) 방문했을 때에는 지진이 발생한 지 1년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아직 복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말라티아(튀르키예) 김제관 기자]
말라이아주의 주도 말라티아의 한가운데에 있는 주요 빌딩과 쇼핑몰은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었냐는 듯 멀쩡했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도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차를 타고 불과 5분 정도만 중심가를 벗어나도 곳곳에 문도 창문도 없이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일부만 가림막으로 덮인 채 늘어서 있었다. 건물 사이 콘크리트 잔해가 너저분하게 놓여있는 황폐한 공터도 곳곳에서 보였다.

상점들은 대부분 컨테이너에서 영업하고 있었다. 이재민이 머물 주택과 주요 공공시설들을 먼저 짓느라 복구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오후 4시경 한 식료품 가게 앞에서는 영업 전부터 2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시내에서 빵 가격이 가장 저렴한 곳이어서,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찾는다고 했다.

말라티아주에서는 지난해 발생한 지진으로 1237명이 사망했고 6444명이 부상을 입었다. 완파된 건물은 6643채였고 심각한 피해를 입은 건물도 3만5907채에 달했다.

“1999년 지진 삼촌과 조카 잃었는데…”
끊이지 않는 지진에 끊이지 않는 비극
에르시 야치시 말라티아주 주지사가 지난 3일(현지시간) 말라티아 주립 공공도서관에서 지진 복구 현황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말라티아(튀르키예) 김제관 기자
말라티아주의 에르신 야치시 주지사는 이날 오전 말라티아 주립 공공도서관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1999년 발생한 지진으로 삼촌과 조카를, 또 다른 지진으로 고모와 사촌을 잃었는데 20여 년 후 같은 비극이 벌어졌다”며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고, 폐허가 된 건물이 늘어나면서 범죄도 두 배 가량 늘어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는 “도시 중심부와 상업지구의 재건을 98% 완료해 지금은 폐허가 없어졌고, 처벌도 강화해 지금은 범죄율이 줄어들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작 지진으로 집과 가족을 잃고 크기가 21제곱미터에 불과한 좁은 컨테이너에서 1년 가까이 대여섯 명의 가족과 함께 사는 이재민들은 이번 겨울 추위가 매섭기만 하다. 말라티아주에는 현재 이재민 11만7232명이 컨테이너 등 임시가옥 3만2295채에 머무르고 있다.

이곳에서 4명의 자녀와 살고 있다는 에미네(44)는 “지난해 지진으로 남편의 형제와 조카를 잃었다”며 “지진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지진의 상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13세 소녀인 류키에 바니르도 “대지진 전에도 지진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했는데, 대지진 이후에는 항상 불안하다”며 “또 다른 지진이 올까봐 늘 두렵다”고 말했다.

컨테이너촌에서 거주한 지 6개월 가량 되었다 카글라(15)는 “가족이 모두 살기에는 컨테이너가 너무 작다”며 “여동생이 당뇨로 고생하고 있는데 제대로 치료할 수 없어 힘들다”고 말했다.

좁은 컨테이너 안에 여섯 식구
온가족이 추위에 떨면서 버텨
3일(현지시간) 튀르키예 말라티아주 예실리우르트의 컨테이너 임시 정착촌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에미네(44)씨. 네 자녀들과 좁은 컨테이너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고 그녀는 전했다. [말라티아(튀르키예) 김제관 기자]
말라티아주 시내에서 20여분 가량 차로 이동하니 눈앞에 공동주택 단지 ‘이키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라티아주 정부는 튀르키예 주택개발부와 함께 이재민을 위한 주택 건설 작업을 진행 중이다.

말라티아주 정부는 주거용 2만3000채, 상업용 건물 1만1000채 등 총 313.51 헥타르(ha) 규모의 신규 건축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말라티아주 정부는 총 2만5000명의 인력을 동원해 1만4636채의 주택을 건설 중이다.

이키제 단지에는 총 736가구 입주할 수 있는데, 집 하나당 크기는 모두 85제곱미터로 동일하다. 방 3개와 거실 1개, 화장실 2개로 구성된 집은 쾌적해 보였다. 말라티아주 주택개발부 관리자는 강진에도 견딜 수 있게 건물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말라티아주 지역에 사는 사람 중 자신이 살던 집이 완전히 파괴됐거나, 가족이 사망한 사람들만 주택 신청을 할 수 있다. 말라티아주 정부는 추첨을 통해 공동주택 거주자를 뽑는다.

추첨에 당첨된 사람들은 주어진 집을 소유하게 된다.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20년 후 일정 금액을 지급하면 되며, 첫 2년 동안에는 집값을 분할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 정부는 당첨된 사람들에게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줄 예정이다.

그래도 폐허 속에서 꽃피는 희망
이재민 공동주택단지 입주 앞둬
튀르키예 말라티아 인근에 건설중인 ‘아키제’ 공동주택단지. 정부는 당첨자들에게 저금리로 주택자금을 빌려줄 예정이다. [말라티아(튀르키예) 김제관 기자]
말라티아주 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 가량 떨어진 아디야만주의 주도 아디야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디야만주의 오스만 바롤 주지사는 4일 오전 메르케즈에 위치한 아디야만 주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59곳의 컨테이너촌에 마련돼 있는 2만1166개 임시거처에서 이재만 7만143명이 머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방문한 아디야만시 k2 컨테이너 임시정착촌에는 1586개의 컨테이너에 3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싸늘한 겨울을 나고 있는 마뫈 술라는 “아직도 지진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다”라며 “하루빨리 안전한 거처로 옮기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토로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재민들이 정부가 건설한 새 공동주택에 이르면 이번 달부터 들어가 살 수 있다는 점이다. 터키 정부가 지진 복구에 투입하는 자금은 약 5000억달러(약 670조원)로 추정되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은 주택 건설에 들어갔다.

지난 2월 지진으로 튀르키예의 주택 약 68만여채가 파괴됐다고 튀르키예 정부는 추산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4일 “앞으로 두 달 동안 약 7만5000채의 새 주택이 인도될 것”이라며 “정부가 올해 총 20만채의 주택을 인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에요.
이제 학교서 마음껏 공부하겠네요”
튀르키예 아디야만시 인근의 공공주택단지. 총 1만2000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로 조성된다. [아디야만(튀르키예) 김제관 기자]
아디야만주에서도 공동주택이 곳곳에서 지어지고 있었다. 바롤 주지사는 “주택 4만4352채를 건설하고 있고, 특히 아디야만주 북부(1만6433채)를 중심으로 건설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디야만시에서 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곳에서는 공동주택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지난해 지진으로 파괴된 마을에서 2㎞ 정도 떨어진 지층이 안정된 지역에 건설되고 있는 공동주택 현장에서 메흐멧 트를르 아디야만 부주지사는 “총 1만2000명이 거주할 수 있는 5층 높이의 공동주택단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진 발생 피해가 적은 지역을 선별했고, 진도 9의 지진에도 버틸 수 있는 내진 설비를 갖췄다”고 설명했다.

새 집으로 곧 이사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컨테이너촌 아이들도 예전보다 훨씬 밝은 모습으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말라티아주 컨테이너촌의 13세 소녀 이키야놀 아스텍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인데, 근처에 학교를 다닐 수 있어 공부에 지장이 없어 좋다”라며 “빨리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며 미소 지었다.

K팝 즐기는 아이들, 창업 꿈꾸는 엄마들
더불어 함께, 삶은 다시 그렇게 계속된다
튀르키예 말라티아주 컨테이너촌에서 살고 있는 15세 소녀 고가 찰라. BTS를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그녀는 한국에 가보는 것이 꿈이다. [말라티아(튀르키예) 김제관 기자]
한국의 노래와 드라마를 즐길 여유를 가진 청소년들도 많았다. 고가 찰라(15)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고, 가수 중에는 BTS를 가장 좋아한다”며 “언젠가는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술을 배워 창업을 노리는 여성들도 만날 수 있었다. 컨테이너촌에서 처음 재봉틀을 다뤄본 아이셰 토플리카노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옷을 만드는 것은 물론 형형색색의 가방과 장식품들을 만들어 외부에도 팔고 있다.

어느 새 숙련공이 된 그는 지금은 다른 여성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토플리카노는 “품앗이로 일을 배우고 있고, 아이들에게도 일을 가르치고 있다”며 “컨테이너촌에서 나간 이후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컨테이너촌에서는 주민들의 심리 치유와 직업훈련을 지원하는 여러 시설도 운영되고 있다. 자폐와 다운증후군 등 특수 교육이 필요한 아동들을 위한 특별학급도 마련돼 있었다. 아이들의 신체 발달을 위한 체육 시설과 놀이방도 운영 중이었다.

튀르키예 말라티아주 컨테이너촌에 있는 재봉틀 시설. 여성들은 이곳에서 창업의 꿈을 키우고 있다. [말라티아(튀르키예) 김제관 기자]
어느 정도 대지진의 상처가 복구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우려스러운 부분들이 드러났다. 말라키아 이키제 공동주택단지는 불과 150일만에 완성됐다. 아다야만 공동주택단지도 불과 4개월만에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지진이 발생한 지 불과 1년만에 30만개가 넘는 새 주택을 건설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건설 속도를 높이고 있다.

말라시아와 아디야만 주정부 관계자는 새 공동주택이 강력한 지진에도 피해를 보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건물 건설에 어느 정도의 예산이 투입됐고 어떤 원리의 내진 설비를 적용했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20년 뒤 입주한 사람들이 집값으로 총 얼마를 내야 하는지도 공개하기 어렵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튀르키예 지방선거를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서 졸속으로 이재민을 위한 공동주택을 완성해 나눠줌으로써 표심을 얻으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튀르키예 유권자는 “정부가 이재민들을 걱정하고 있고,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내줄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공동주택 제공을 통해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에 고통받고 있는 튀르키예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주택 공급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건설 품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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