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과학계 `모래주머니`, 더 벗겨내라
발목에 모래 주머니를 차고 생활했다. 그 생활만 올해로 17년째다. 모래 주머니는 매번 정권 때마다 발목에서 풀어질 것으로 잔뜩 기대했다. 그렇게 해 줄 거라 얘기하고 약속도 받았다. 그런데 막상 새 정권이 들어서면 모래 주머니는 떼어지거나 가벼워지는 커녕, 더 많은 모래로 채워져 무거워졌다. 때로는 새 모래 주머니로 갈아 끼워져 더 단단하게 발목에 채워졌고, 뛰어야 하는 운동장도 매 정권마다 달라졌다.
여기 가서 뛰라고 해서 죽어라 뛰었더니, 5년이 지나 정권이 바뀌면 다시 저기 가서 뛰라고 했다. 그렇게 무거운 모래 주머니를 차고 여기저기 뛰느라 체력이 바닥 났다. 한 운동장만 줄곧 뛰어도 모자랄 판에 이곳 저곳 뛰다 보니 앞서 가는 주자와 격차는 더욱 멀어졌다. 모래 주머니를 찬 추격자 신세만 어느덧 17년이 지났고, 그 사이 정권도 5번이나 바뀌었다.
모래 주머니를 발목에 차고 17년 간 여러 운동장을 뛴 비운의 선수는 다름 아닌 '25개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 부설기관 4개 포함)이다. 그런 과기 출연연이 지난달 31일 열린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 족쇄와 같았던 모래 주머니가 '기타 공공기관 지정 해제'라는 이름으로 풀어졌다.
과기 출연연의 공공기관 지정 해제는 과학계의 오랜 숙원이자 염원이었다. 지난해 11월 윤석열 대통령이 과학계의 건의를 받아 들여 부처에 지시한 지 2개월 만에 전격 처리됐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17년 동안 꼼짝도 안 했던 과학계의 대표적인 규제 덩어리가 해소된 셈이다.
과기 출연연은 2007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이 제정·시행되면서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연구기관 특수성이 반영되지 않은 채 '기타공공기관'이라는 틈바구니에 묶여 정부의 관리 감독을 받아 왔다. 서울대학교병원, 독립기념관, 중소기업은행, 공영홈쇼핑 등이 과기 출연연과 함께 기타공공기관으로 분류됐다.
기관 성격과 역할이 달랐음에도 과기 출연연은 이들 공공기관과 똑같은 잣대로 인력정원(T/O), 인건비, 예산 등에 있어 기획재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심지어 매 정권 때마다 공공기관 혁신과 경영 효율화, 선진화 추진이라는 이름으로 연구기관에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제도들이 일방적으로 도입됐다. 대표적으로 정년단축, 임금피크제, 주 52시간제, 블라인드 채용,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공공기관 혁신 가이드라인 등이다.
과기 출연연에 맞지 않는 새로운 제도들이 하나 둘씩 도입되면서 연구자들은 연구소를 떠나 대학과 기업으로 옮겨 갔고, 연구 환경은 점점 불안정해져 갔다. 연구기관 성격과 연구개발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2018년 과기 출연연은 기타공공기관 내 '연구개발목적기관'으로 별도 분류돼 다소 숨통이 트인 듯 했다. 발목에 채워진 모래 주머니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겨 언젠가 모래가 다 빠져 나가 몸이 가벼워질 것이라 부푼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시행령 등 세부 규정을 정부 관료들이 마련하지 않아 그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이 5년 가까이 모래 주머니 신세는 이어졌다. 여기에 정부 R&D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과기 출연연은 운동장에서 열심히 뛸 희망마저 사라졌다.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공공기관 지정 해제를 통해 모래 주머니를 뗄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지난 17년 동안 과학계 연구현장의 철옹성과 같았던 공공기관 지정 해제가 비로소 이뤄진 것이다.
과학계는 환영의 목소리를 내고 크게 반겼다. 기대감도 커졌다. 하지만, 대통령을 동원했다는 이유로 기재부 심기를 건드린 괘씸죄(?)로 이전보다 과기 출연연에 대한 관리 감독과 규제가 더 팍팍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1년 단위 성과평가 얘기가 나오고, 출연연 예산과 인력 등을 통합 운영하는 강력한 규제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모래 주머니를 달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고 뛰기 어렵다. 모래 주머리를 달고 메달을 따 오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전 분야에 걸친 과감한 규제 혁파를 주문했다. 과학계에서 모래 주머니와 같은 '덩어리 규제 뽀개기'가 시급하다. '공공기관 지정 해제' 후속방안으로 마련될 제도와 규정들이 제2, 제3의 모래 주머니가 다시 되지 않도록 연구 현장과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bong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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